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지역신문뉴스

예산산성 ‘국가사적’ 탄력받나

발굴조사서 백제 성벽·원삼국 환호유적 확인 <br>전문가 “역사성·상징성 충분… 더 부각시켜야”

2020.04.27(월) 17:18:39 | 관리자 (이메일주소:dk1hero@yesm.kr
               	dk1hero@yesm.kr)

 

예산산성국가사적탄력받나 1
(재)비전문화유산연구원 관계자들이 예산산성 백제성벽을 발굴하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예산군 ‘지명탄생 1100년’을 상징하는 예산읍 산성리 예산산성.


이곳에서 백제시대 성벽과 그 이전에 설치한 환호(環濠, 방어용 인공도랑) 등이 천수백여년 동안 무수한 세월 속에 감춰졌던 모습을 드러내 국가사적 지정전망을 밝히고 있다.


예산산성은 역사적으로 무한산성·고산성·오산성 등으로 불렸다. 고려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1년여 앞둔 934년 5월 행차해 대민교서를 반포했고, 조선 초 태안지역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한 태종이 하루를 머물기도 했다.


그 앞으로 백성들의 젖줄인 무한천을 끼고 육지 속 섬처럼 우뚝 솟은 모습은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점을 실감케 한다. 1894년에는 관군이 전투를 벌이다 동학농민군에 함락된 현장으로, 충남도는 1982년 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했다.

 

예산산성국가사적탄력받나 2
성벽 단면. ⓒ 예산군


도와 군에 따르면 국가사적 승격사업으로 (재)비전문화유산연구원이 ‘예산산성 북성벽 축조기법 확인 발굴조사’를 추진한 결과, 흙을 층층이 다지는 ‘판축’으로 성벽을 만든 전형적인 백제시대 토성형태로 나타났다. 이 안에선 동시대 기와편과 토기편도 출토했다.


구체적으로는 백제시대 처음 축조한 이후 조선시대까지 ‘기저면-기저부-성벽 내외부·상부(석축)’ 순으로 조성했으며, 이를 종합하면 백제~통일신라~고려~조선에 걸쳐 사용하다가 조선 중기에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성벽 하부에선 예산산성을 축조하기 전 원삼국시대 방어시설인 환호유적 3개, 주거지, 목책 등 선행유구와 연질토기편, 대옹편 등 유물들을 발굴했다. 환호의 경우 내포신도시 홍북읍 석택리 환호유적과의 연관성도 주목받고 있다.


도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역사적 가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해 국가사적 지정추진도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해준 도문화재위원은 22일 현장설명회를 찾아 “원삼국~고려시대는 군사와 모든 것이 육로가 아닌 수로로 이동하던 문화다. 당시 무한천이 중요했고, 예산산성은 수로를 장악했던 전략적인 거점지역이다. 태조가 방문한 이유가 그것이다. 이 역사성과 상징성을 부각시켜야 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관리자님의 다른 기사 보기

[관리자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