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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백제 역사 속 황산벌과 황산성

2020.04.22(수) 16:30:57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남은 옛 백제의 땅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백제의 유산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공주와 부여 두 곳은 백제의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황산성을 아시나요? 한때 국회의원을 했던 변호사 '황산성'이 아닌 패망한 나라 백제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 중 하나로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 산63번지 일원에 있는 황산성 말입니다.

황산성은 여러분께서 너무도 잘 아는 백제의 계백 장군이 신라가 맞붙어 싸웠으며, 신라의 화랑 관창을 살렸다 죽이기도 한 백제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을 내려다 보는 곳, 황산에 자리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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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는 백제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황산벌과 황산성(黃山城)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논산시 연산면의 황산성은 황산성 남문지구로 약 9km 정도 떨어져 있는 계룡산 국립공원 향적산을 향한 능선 탐방을 위한 출발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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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쌓아 만들어진 성벽이 보이나요?
 
황산성의 남문지역이지만 안타깝게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잡초만 무성하고 덩굴 식물들이 성벽을 덮어버려 어디가 황산성인지 잘 모를 수도 있을 정도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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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성(黃山城)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표정리 산 20 해발 264m의 그다지 높지는 않은 황산의 정상에서 남향한 비탈을 긴 마름모꼴로 에워싼 옛 성으로 성문 터가 사방에 있는데, 가장 낮은 남문 쪽은 문의 안쪽에 우물과 건물 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지(城址)로 황산성을 황성(黃城), 북산성(北山城), 성황산석성(城隍山石城)으로도 불렀습니다.

거의 허물어진 상태로 유지하고 있지만 북쪽의 경우 적의 침입이 어려운 지형 조건을 이용하여 날벽에 자연석으로 축성하였고 나머지 지역에는 활석(滑石)을 사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백제의 웅진시대와 사비시대에 걸쳐 축조한 둘레가 870m의 산성으로 1985년 07월 19일 충남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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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멸망을 고스란히 지켜본 황산성 북쪽은 계룡산 국립공원의 깃대봉·함지봉·백연봉·상여바위·향적산·국사봉·계룡산 상봉으로 이어지는 계룡산 능선인데, 황산성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직까지는 황산과 황산성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는 터라 이대로 방치되고 있지만, 하루 속히 공산성을 복원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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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향적산 탐방로 방향에서 등을 돌려 황산성 둘레길 동쪽으로 정자 방향을 바라보면 중간에 푹 꺼진 부분이 보이는데, 이곳이 남문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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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돌무더기 형태의 성벽이 띄엄띄엄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루라도 빨리 복원되어 옛 모습을 되찾는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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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성 입구에서 남문지로 올라서면 마주 보이는 곳이 바로 이곳인데, 성안 사람들이 사용하던 샘으로 황산의 거의 정상부 가까운 곳에서 솟아나고 있는 신비한 샘이랍니다.

내부는 화강암으로 둥글게 축조되어 있는 샘에는 평평하게 물이 고여 넘치고 있지만 식수나 생활 용수로 사용하지 않으니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부유물로 뒤덮여 있습니다. 언젠가 황산성 둘레길이 완성되고 나면 깨끗하게 관리하고 유지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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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성의 북쪽으로 이어지는 동쪽 성벽의 성벽길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이 길로 1400년 전 백제의 군사들은 얼마나 다급하게 뛰어다녔을까요?

황산성 안에서는 백제토기편이 많이 발견되고, 또 ‘대안원년(大安元年)’, ‘황산인방(黃山寅方)’으로 판독되는 명문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백제 5방성 중 동방성(東方城)이었던 덕안성(德安城)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대안(大安)’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고 백제 특유의 삼족토기(三足土器)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고려시대 기와파편·자기편(磁器片)과 조선시대 백자편(白磁片) 등이 남아 있어 백제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동남쪽 평야지대는 백제 멸망 당시 큰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산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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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성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그옛날 논산이 백제의 땅이었고 백제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황산벌 전투는 세계 전사에도 기록된 유명한 전투입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에 불안을 느낀 백제 성왕이 고구려에 대응하기 동맹을 맺었던 신라에 배신당한 뒤 신라를 치러 출정하였다 전사합니다. 그로부터 100년 간 절치부심해 오던 백제는 의자왕에 이르러 강성한 국력을 바탕으로 신라를 치게 되는데, 신라가 오히려 당나라와 연합하여 당나라를 백제로 불러들입니다. 금강 하구 기벌포를 통해 백제의 수도를 향해 진격하던 당나라군을 도와 신라는 군량미 등 병참을 책임지기로 함과 동시에 백제와 일전을 준비합니다.

신라군이 황산벌에 진출한 날짜는 660년 음력 7월 9일이며, 계백 장군이 5천의 병사와 결사항전의 의지로 전장으로 나가면서 "전쟁에 지면 나의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라며 가솔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이 전투와 관련해 전해져 내려오는 너무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결국 계백 장군이 이끄는 5천의 결사대는 거듭되는 신라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장렬히 전사하고 맙니다. 이것이 곧 백제의 멸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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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랑 관창의 전사지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인 연산면 방향의 성벽은 역시 거의 다 허물어진 상태이고 수목이 우거져 있지만 멀리까지 바라보려면 자리를 잘 잡아야 합니다.
  
나당연합군이 쳐들어 와 계백 장군이 신라군과의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임에도 그같은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전적비 하나 찾을 수 없습니다. 계백 장군의 지휘 사령부와 군량미 등을 보관한 병참 황산성, 전투 중 사망한 오천결사대의 시신을 함께 장사지냈다는 시정골 등을 품고 있는 연산면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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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로 나들이에 불편을 겪는 요즘 아이들과 함께 도시락을 준비해 역사의 현장으로 소풍을 떠나 즐길 수 있는 정자가 전망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니 좋지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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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누군가의 염원이 담겼을 수많은 돌탑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돌탑들을 쌓기보다 황산성의 복원을 기대하는 입장에서는 있는 그대로 돌들을 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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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성 남문 입구에는 자동차를 주차할만한 충분한 공간도 있고, 이렇게 음수대까지 마련되어 있어 여느 곳보다 산행이나 소풍을 즐기기에 좋습니다.
 
계룡도령이 소개한 황산성은 논산시 상월면이나 연산면에서 접근이 아주 쉬운데, 한 번쯤 찾아 아름다운 자연과 백제의 슬픈 역사도 돌이켜 보면서 지난 역사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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