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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처음 소개되는 논산 효부 용인이씨정려

계룡도령이 대한민국 처음으로 소개하는 역사의 현장

2019.12.08(일) 12:47:55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청남도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꽤나 오래된 듯 보이는 시설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건축물이나 시설들의 흔적을 찾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러한 건축물이나 시설물들의 이야기를 찾기도 하고,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을 통해서 알아가기도 하는데 계룡도령에게는 그렇게 찾고 소개한 내용이 몇 가지 있는데 이번에 또 새롭게 찾아낸 이야기를 인터넷 사상 최초로 소개합니다.
 
처음소개되는논산효부용인이씨정려 1

이곳이 어디일까요?
인터넷에서 아무리 찾아도 주소나 명칭이 나오지 않는 이곳은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의 탑정저수지에서 사계 김장생의 묘소로 가기 위해 고정산 터널을 향해 충곡로를 따라가다 도로에서 살짝 벗어난 왼쪽에서 만나게 되는 효부(孝婦) 용인이씨정려(龍仁李氏旌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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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소개되는논산효부용인이씨정려 3
 
계룡도령이 2019년 3월부터 몇 차례나 오고 간 결과 사계절의 정취도 있고, 달랑 사진 한 장으로 효부(孝婦) 용인이씨정려(龍仁李氏旌閭)를 소개하기보다는 좀 더 보기 좋게 소개할 만하다는 생각에 글을 쓰려고 여기저기 자료를 수소문하지만 아무런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네요, ㅠ.ㅠ.

그래서 정려 주변에 좌우로 비석이 2기가 서 있는 특이한 형국이라 우선 비석을 살펴 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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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부(孝婦) 용인이씨정려(龍仁李氏旌閭)의 오른쪽 비석은 '윤엄오세탁박사송덕비(倫奄吳世鐸博士頌德碑)'인데, 용인이씨 정려지에 웬 오씨의 비석인가 하는 생각으로 의구심이 생깁니다. 빽빽하게 적힌 비문에는 동복오씨 소헌공파(同福吳氏 素軒公派) 문중을 위해 쏟은 효부 용인이씨의 물심양면 지대한 공을 기려 근래에 세운 것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동복오씨의 연원을 다 살펴 보아도 동복오씨 소헌공파(同福吳氏 素軒公派)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래는 동복오씨 대종회에서 가져온 것이랍니다.

"시조 오현좌(吳賢佐)는 고려(考慮) 고종 때 동복군(同福君)에 봉해졌다. 그의 선계(先系)는 중국에서 지증왕(智證王) 원년(서기501년) 우리 나라로 건너온 무혜공(武惠公) 오첨(吳瞻)이고, 23대손 병부상서(兵部尙書) 오수권(吳守權)은 고려 고종 3년 거란군(契丹軍)이 침입했을 때 오현보(吳賢輔), 오현좌(吳賢佐), 오현필(吳賢弼) 등 세 아들에게 이를 격파케 하였다. 그 공으로 오현보(吳賢輔)는 해주군(海州君)에, 오현좌(吳賢佐)는 동복군(同福君)에, 오현필(吳賢弼)은 보성군(寶城君)에 각각 봉(封)해졌다. 그리하여 오현좌(吳賢佐)의 후손들은 오녕(吳寧)을 시조(始祖)로 하고 동복(同福)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 동복오씨 씨족의 연원

동복(同福)은 원래 전남 화순군(和順郡)에 있는 지명이다.동복은 마한(馬韓)시대에는 비리(卑離)의 치소(治所)였고 백제(百濟)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이라 하였고.신라(新羅)시대에 동복(同福)이라 하여 곡성군(谷城郡)에 속하였고 고려조(高麗朝)에는 보성군(寶城郡)에 속하다가 고승(高僧) 조영(祖英:光札아들)의 향리(鄕里)라 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태조(太祖) 3년(1334)에 다시 분리(分離)되어 오다가 1914년 화순군(和順郡)으로 합하였다. 동복의 군명(郡名)의 변천(變遷)으로 보면 비리(卑離),두부지(豆夫只),구성(龜城),옹성(壅城),라복(蘿?) 동복(同福)의 순으로 되어 있다. 동복면(同福面)의 면적은 62k㎡이며 행정(行政) 동리(洞里)는 22개소 이고 자연부락(自然部落)은 26개소.법정(法定) 동리(洞里)는 12개소이다.
 -동복본관지 연혁

[파명록(派名錄)]귀은공파(歸隱公派). 감천공파(感泉公派). 의재공파(毅齋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판사공파(判事公派). 주서공파(注書公派). 만취공파(晩翠公派), 묵재공파(默齋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매암공파(梅庵公派),금위장공파(禁衛將公派),승지공파(承旨公派),소윤공파(少尹公派),재신공파(宰臣公派),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진무장공파(鎭撫將公派) 17개파이다.
 -파명록(派名錄)"

대종회의 글을 상세히 읽어 보아도 소헌공파(素軒公派)는 보이지 않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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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왼쪽에 서 있는 비는 2008년 5월 20일 세운 용인이씨효행사적비(龍仁李氏孝行事蹟碑)로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가득 채워진 비석에는 용인 이씨[1766년(영조42 병술년)~1833년(순조33 계사년)]인 효부는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이찬우(李燦祐)의 딸이며 동복오씨(同福吳氏) 묵재(默齋) 오백령(吳百齡)의 7대손 증조대부동몽교관 오선(贈朝大夫童蒙敎官 吳선-아래 그림으로 대체)이며 혼인 전 아버지가 출타 중 할머니가 노환이 악화되어 백약이 무효라 부득이 손가락을 터트려 피를 흘려 넣으니 깨어나고 이후 돌아온 아버지와 상견하고 천수를 마쳤다고 하며 나이가 차 동복오씨집으로 시집을 가서 보니 시가는 가난하고 시부가 노쇠하고 병환이며 남편 또한 병약한지라 가진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시부모 모시기가 너무 어려웠으며 더욱이 백약이 무효인 시아버지를 간호하며 고기 살 돈이 없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탕제 하여 먹여 생명을 이어가게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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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할 선(善) 이전에 사용하던 한자로 이 역시 착할 선자입니다. 1870년(고종 7 경오년) 명정하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종산에 문각을 세웠으나 이곳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고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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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부(孝婦) 용인이씨정려(龍仁李氏旌閭)를 살펴 볼까요? 그 전에 용인이씨에 대해서 좀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용인이씨는 휘 길권(諱 吉卷)을 시조로 하여 그 후손들이 고려조와 조선조를 거치면서 천여년간 한반도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시조는 신라 헌강왕 6년 서기 880년에 용인의 토호로서 유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워 그 공로로 식읍(食邑) 500호와 산성군(山城君)에 봉군했으나 이를 사양하니 왕건은 그 덕을 더욱 높여 구성백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태사(駒城伯 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 太師)의 벼슬을 내리고 안의공(安毅公)의 시호를 주어 그가 살던 용인을 본관으로 삼게 하였답니다.
 
9세기 말 10세기 초에 이르러 신라 조정의 통치권이 쇠약해지고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게 되자 각 지방에 세력을 가진 토호들이 할거하게 되는데, 당시 용인지역에는 이길권(李吉卷)이 유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왕건을 도와 삼한을 통일 한 후 고려가 건국되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봉되고 구성백(驅城伯)에 봉해지면서 용인을 관향으로 하는 용인이씨의 시조가 되었답니다.

고려개국 후 용인이씨 중 덕종 때 문하시랑을 지낸 이효공(李孝恭)과 인종 때 평장사를 역임한 이현후(李鉉候)가 있고, 충렬왕이 몽골복장을 장려하자 마땅하지 않음을 여러 차례 극간하다 귀양을 갔던 판도판서 이광시(李光時)가 있습니다.

광시의 아들로 이중인(李中仁)이 있는데 고려 8현, 두문동 72인의 한 분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가문이 번성함에 후손들은 이중인(駒城府院君, 시호: 忠肅公)을 중시조로 받든다고 합니다. 이중인이 관직에 있을 때 고려가 망하자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면서 후손들에게 '조선조에서는 출사(出仕)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지낸 아들 이사영(李士潁), 손자 이백찬(李伯撰)은 3대에 걸쳐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고 합니다.
 -용인이씨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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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고색이 창연한 정려문각은 사면이 홍살로 되어 있어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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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 안에는 효부정문중건기(孝婦旌門重建記)와 명정(命旌)된 정려(旌閭)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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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부 증동몽교관조봉대부오선지처 증영인용인이씨지문 동치구년구월일명려(孝婦 贈童蒙敎官朝奉大夫吳선之妻 贈令人龍仁李氏之門 同治九年九月日命旌)"동치(同治)는 서기 1862~1874년 동안 쓰였던 청나라 목종 때의 연호(年號)로 1862년이 동치 1년이니 동치 9년이라면 서기 1870년으로 고종 7년 경오년입니다. 이때 내려진 정려에는 위와 같이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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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 문각에는 정려와 1967년 기록한 효부정문중건기(孝婦旌門重建記)가 걸려 있는데, 비석의 비문에서는 더 많은 중수와 건축이 있었다고 합니다만, 달랑 이것 하나만 붙어 있어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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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비석의 비문을 다 읽어 보고 나서야 용인이씨정려(龍仁李氏旌閭)에 동복오씨 소헌공파(同福吳氏 素軒公派) 문중을 위해 지대한 공을 세운 '윤엄오세탁박사송덕비(倫奄吳世鐸博士頌德碑)'가 세워진 이유도 알게 되었는데 정려를 바라보는 왼쪽의 묘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네요. 다음에 또 방문하게 되면 저 묘소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동복오씨가 광산김씨의 본거지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이야기도 한 번 찾아 봐야겠습니다.
 
계룡도령의 몇 차례에 걸친 탐방과 깨알같은 비문을 읽어서 작성한 글이 앞으로 또 누군가가 이 효부(孝婦) 용인이씨정려(龍仁李氏旌閭)를 찾게 된다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효부(孝婦) 용인이씨정려(龍仁李氏旌閭)는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16-9(산 7번지)의 귀퉁이 신풍리 192-2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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