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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당신, 나 같은 사람한테 어찌 왔는가?”

평생 농사짓던 어르신들, 그림책 작가가 되다

2019.11.10(일) 21:56:06 | 황토 (이메일주소:enikesa@hanmail.net
               	enikesa@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쓰고 그린 그림책을 읽어주는 박송자 할머니
▲자신이 쓰고 그린 그림책을 읽어주는 박송자 할머니

어르신들이 직접 농사지은 농산물로 만든 간식
▲어르신들이 직접 농사지은 농산물로 준비한 간식
 
“이제는 무거운 거 있으면 꼭 자기가 들어, 무릎이 아프니까 절대 들지 말라고 해. (철들어서 그래유~).
 술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이제는 꽃도 예쁘게 잘 길러. 꽃 심으면서 나한테 이런 말도 해. 나 같은 사람한테 어찌 왔는가, 항시 고마워. (아우~ 눈물나려구 해.) 
 큰 아이들이 집에 찾아오면 이런 말도 해. 아이들 키우느라 당신 고생 많았소. 우리는 참 잘 살았지. 어떻게나 50년 동안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으니께.(와~ 짝짝짝).”

박송자 할머니가 그림책 <꽃 심는 닭>을 읽었다. ‘나 같은 사람한테 어찌 왔는가, 항시 고마워.’ 이 대목에서 문득 400여 년 전, 먼저 간 남편에게 아내가 쓴 편지글 ‘원이 아버지께’가 떠올랐다. 박송자 할머니는 신랑이 누군지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스물한 살에 할아버지와 결혼했다. 5남매를 낳고, 시부모를 모시며 눈코 뜰 새 없이 살았다. 자식들 다 여의고 이제 부부만 남아 서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할머니가 책을 읽는 중간에 박상신 이장님이 추임새를 넣었다. 그 말에 웃기도 하면서, 듣는 내내 코끝이 찡했다. 이장님의 그림책 후기(?)가 이어진다.
 
“부부애가 느껴지는 이야기쥬~? 근데 할아버지가 진짜 술을 엄청 좋아해유. 원래는 첨에 이 책 제목을 ‘술 먹는 닭’으루 했었슈. 근데 ‘꽃 심는 닭’으로 바꿨어유. 할아버지가 누군지 궁금하쥬? 좀 기다려 봐유. 곧 만날 거유.”
 
부여송정마을
▲부여송정마을
 
당신나같은사람한테어찌왔는가 1
 
당신나같은사람한테어찌왔는가 2
 
그림책에 담긴 삶의 파노라마가 무지개빛깔로 펼쳐지는 시골마을이 있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이 농사짓고 살아가는 시골. 여느 시골농촌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곳 어르신들은 남다른 자부심과 자신감이 있다.
 
부부그림책작가의 집
▲부부그림책 작가의 집
  
당신나같은사람한테어찌왔는가 3
 
당신나같은사람한테어찌왔는가 4
 
대전의 ‘그림책첫걸음’ 모임의 회원 10명이 지난달 25일(금) 부여 송정그림책마을을 방문했다. 늦가을 오전 햇살이 퍼지는 마을 풍경은 그대로 그림책의 한 장면이었다. 논에는 아직 수확하지 않은 벼들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그림책정거장’에서 이장님을 만났다. 그를 따라 마을 안으로 걸어가는 회원들의 뒷모습이 마치 동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정거장이 있는 마을 초입엔 23명의 그림책 작가이름이 비에 새겨 있다. 모두 송정마을의 어르신들이다.  
 
그림책읽어주는 모델 할머니
▲그림책 읽어주는 모델 할머니
 
느티나무가 있는 쉼터 벤치에는 그림책을 읽는 할머니 모델이 있다. 마을을 방문한 사람들은 십중팔구 그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 아쉽게도 모델이 된 할머니는 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당신나같은사람한테어찌왔는가 5
 
당신나같은사람한테어찌왔는가 6
  
3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마을의 평균 연령은 거의 70·80대이다. 평생 농사짓고 살아온 노인들 손에 어느 날, 호미 대신 연필과 붓이 들렸다. 낯설고 어설펐다. 당신들의 이야기가 어엿한 그림책이 된다는 걸 그땐 상상이나 했을까. 글이나 그림은 도시에서 공부하는 자식과 손주들에게나 해당되는 거라고 여겼던 어르신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회관에 모였다.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 시작은 반이었다. 책이 나오자 서울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마을이 바빠졌다.
 
그림책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로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정화수가 되어 소박하고 따뜻하며 뭉클해 웃다가 눈물이 떨어지는가 하면, 목구멍에 알 수 없는 아릿한 슬픔이 걸리기도 한다.
 
그림책은 정겹고 꾸미지 않은 순박함으로 자연스레 동심에 젖게 한다. 마을노인들이 어떻게 그림책 작가가 되었을까. 그림책을 쓰고 그린 분들의 자부심과 자신감은 그대로 표정에 묻어난다. 당당하다.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마을은 그림책으로 활기를 띤다.
 
그림책마을 정거장에 오셨습니다.
▲그림책마을 정거장에 오셨습니다
 
송정마을은 2013년 희망마을사업 공모에 선정되고, 2015년 ‘창조지역사업’에 뽑혔다. 문화예술단체인 사단법인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과 주민과의 만남은 ‘송정그림책마을’을 있게 한 시초가 되었다. 이 사업을 통해 마을주민들이 ‘쓰고 그리는 공부’로 자신들의 살아온 여정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농부여>, <찌그럭 째그럭>, <내 상추가 최고야>, <농가월령가>, <아버지의 두루마리>, <누룽지>, <가마니 팔러 가는 날>, <그리운 야학>, 등 제목만 읽어도 이야기가 눈에 그려진다. 
 
야학당건물
▲야학당건물
 
마을에는 1925년에 세워진 송정야학당 건물이 있다. 마을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만들었다. 어디서든 쉽게 올 수 있도록 마을 중앙에 위치해 있다. <그리운 야학>은 일제강점기 우리 한글 교육이 어려웠던 시대에 공부한 이야기이다. 야학당은 자체적으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가을 추수가 끝난 11월부터 1월까지 세 달 동안 저녁마다 교실이 열렸다. 저녁 늦게까지 공부했지만 ‘졸려도 좋았어. 그냥 좋았어. 바빠도 좋았어.’라고 배우는 기쁨을 기억한다. 닫힌 문을 여니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병풍이나 농기구 등이 놓였다. 장정 서너 명이 들어가면 적절할 그곳에 그 시절 아이들이 많게는 50명까지 들어갔단다.
 
당신나같은사람한테어찌왔는가 7

“…60년 동안 농사를 지었어. 호박을 키우고 감자를 키우고 깨도 키웠어. 고추, 가지, 마늘, 무, 콩하고 팥하고 옥수수도 키웠어. 먹는 건 다~ 내가 키웠어. (와하하~짝짝짝).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고 장가를 갔어~. (와~). 아이를 낳고 아들을 키워서 장가 다 보내고, (오~), 칠십이 넘은 할아버지지만 아직도 농사를 져. 내가 져서 내가 먹고 우리가 먹고 세~상이 다 먹어. (와~ 짝짝짝!!).”
 
<나는 농부여>의 작가 이만복 할아버지가 자신의 그림책을 읽었다. 평소에 술을 좋아해서 할머니 모르게 빈 병에 막걸리를 담아 밭에 가기도 했단다. <꽃 심는 닭>을 쓰고 그린 박송자 어르신과는 부부로 명실공히 부부그림책 작가이다.
 
아담한 2층 그림책마을찻집 창가에 늦가을 볕이 따스하게 비춘다. 이곳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소중한 공동체를 만드는 공간이다. 젊은이와 아이들이 떠난 시골마을은 이제 아이들 손을 잡고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오랜 동안 마을이 간직한 이야기가 그림책으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곳. 송정마을은 다른 농촌 시골마을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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