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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유관순 열사 재평가에 흐뭇

2019.03.02(토) 10:48:04 | 홍경석 (이메일주소:casj007@naver.com
               	casj007@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천안 아우내장터를 피로 물들이던 순사놈들 / 함경도 화대장터에도 나타나 / 독립을 외치는 선량한 백성 가슴에 총을 겨눴다 / 그 총부리 아버지 가슴을 뚫어 관통하던 날 / 열일곱 꽃다운 청춘 가슴에 불이 붙었다 /

관순을 죽이고 풍신을 죽인 손 / 정의의 핏발은 결코 용서치 않아 끓어오르던 핏빛 분노 / 차디찬 서대문 감옥소 철창을 녹이고 / 얼어붙은 조선인 가슴을 녹였다 / 보라 남과 북의 어린 열일곱 두 소녀 /

목숨 바쳐 지킨 나라 어이타 갈라져 등지고 산단 말인가 / 남과 북 손을 부여잡고 / 다시 통일의 노래를 부를 그날까지 / 님이시여 잠들지 마소서!” - 이윤옥 시인이 쓴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이라는 시(詩)다.

다 알다시피 유관순 열사가 참여한 천안 아우내 장터의 시위엔 3,000여명이나 몰렸다. 이 시위에서 일본 헌병과 순사들이 쏜 총으로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을 비롯해 19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유관순 열사는 “나의 유일한 슬픔은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뿐이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뼛속까지 애국심으로 가득찬 유관순 열사는 가족 모두가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그러나 이를 아는 국민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정부가 제100주년 3·1절을 맞아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유관순 열사는 31번째 대한민국장 포상자가 됐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되 참으로 잘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유관순 열사에게 수여된 훈장은 ‘기껏’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이었다. 하지만 훈격이 낮아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해야 한다는 국민청원과 국회 특별법 제정 노력 등이 이어졌다.

정부는 이 같은 유관순 열사의 서훈 상향을 요구하는 열망에 따라 기존 독립운동 공적 외 국가보훈처에서 별도 공적심사위원회(유관순 열사 추가 서훈 공적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참석위원 만장일치로 대한민국장 추가 서훈을 심의·의결했다고 한다.

필자가 고향이 천안이래서가 아니라 유관순 열사는 정말이지 충절의 도시인 천안이 배출한 명불허전의 독립운동가였다. 당연한 주장이겠지만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옳다. 뒤늦게나마 유관순 열사가 대한민국 최고 훈장을 받게 된 것은 유관순 열사께서 지하에서도 기뻐하실 쾌거이다.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이라는 시를 인용한 김에 동풍신(董豊信, 1904-1921)을 호출한다. 그녀는 함경북도 명천(明川)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하가면 화대동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은 3월 14일 함경북도에서 펼쳐진 만세시위 중 최대 인파인 5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화대헌병분견소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한 곳이다.

이날 화대장터에는 오랜 병상에 누워있던 동풍신의 아버지 동민수(董敏秀)도 전날의 시위 때 일제의 흉탄에 동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각오하고 병상을 떨치고 일어나 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동풍신의 아버지는 만세시위를 벌이던 중 길주헌병대 제27연대 소속 기마헌병과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동풍신은 현장으로 달려와 아버지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동풍신이 슬픔을 딛고 결연히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위군중은 크게 감동하여 힘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 동풍신은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악랄한 고문 끝에 17살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이라 할 정도로 유관순 열사와 필적할 만한 독립운동의 업적을 이룬 동풍신 애국지사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유관순 열사와 같은 나이에 유관순이 아우내장터를 이용하여 만세를 불렀다면 동풍신은 화대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유관순의 아버지가 일제의 총검으로 현장에서 죽어 간 것과 동풍신의 병든 아버지가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그 자리에서 죽어 간 것도 닮았다.

그러나 한 분은 만고의 열사가 되고 한 분은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은 어인 일인가? 이는 남북한의 분단에 의한 정치적 입김에 따른 역사기록의 편향성 때문이라고 본다. 해방공간에서 우리는 독립운동가를 제대로 추스를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념 아래에 갈라서는 운명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터진 1950년 한국전쟁은 민족 간의 피를 불렀고 이후 남한에서는 북한에 관한 것이라면 모두 적대시하는 분위기에서 북쪽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할 수 있는 여건을 갖지 못했다.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면서 독립운동가의 존재 가치까지 덩달아 분단되었다는 아픔을 금할 길 없다. 지난 3.1절에 필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특별 기획된 <3.1 독립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100인전(人展)>을 찾아 취재했다.

거기에서도 느낀 바였지만 동풍신과 박열, 김원봉 등의 독립투사들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세계유일의 분단(分斷)국가다. 이런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통탄스럽거늘 독립운동가들의 인지도(認知度) 역시도 ‘분단’되어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유감이다.

이제라도 남북의 관계자들이 만나서 이에 대한 개선의 여지와 함께, 남북이 모두 알 수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더욱 기렸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끝으로 유관순 열사에게 수여된 최고 훈장을 국민과 함께 거듭 축하한다.

우리의 자랑! 유관순 열사
▲ 우리의 자랑! 유관순 열사

대한독립만세
▲ 대한독립만세

태극기여 영원하라
▲ 태극기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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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 선생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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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 신채호 선생의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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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에 대한 단단함은 유관순을 닮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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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정신 광명정대’로 더 밝은 대한민국을 창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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