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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소론의 영수 윤증을 모신 논산 유봉영당

2019.01.31(목) 14:49:55 | 연주의 꿈꾸는 다락방 (이메일주소:yeonju7890@naver.com
               	yeonju7890@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논산에 가면 여행지이면서 대표적인 고택으로 윤증고택이 있는데요. 실제 실리적인 유학자 윤증은 그곳에서 그곳에서 거주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소박한 고택인 유봉 영당이라는 곳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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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유봉 영당에서 세상을 떠난 윤증을 후손들에게 유지를 내렸다고 합니다. 손이 많이 필요한 음식과 기름으로 볶아야 하는 전들은 제사상에 올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윤증은 노비들에게 재산 소유와 가정을 꾸미는 것이 가능하도록 주거를 제공하는 외거노비를 활용하고 집 밖에 쌀을 놓고 배고픈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해주었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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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던 붕당은 다시 서인에서 송시열과 윤증이라는 스승을 변호하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논쟁을 벌임으로써 조정이 시끄러워지고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된 역사적인 분쟁이 회니시비입니다. 저 앞에 보이는 고택이 유봉 영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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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대덕구의 작은 고장이라고 생각하는 회덕이라는 이름은 지금 동춘당공원이 있는 송촌동 일대와 법동, 회덕, 읍내를  모두 아우르는 회덕현이라는 곳으로 대전의 중심이었습니다. 회덕에는 은진 송 씨가 터를 잡고 살았는데 송시열이 바로 그곳을 터로 움직였도 지금은 노성면인 니성에는 파평 윤 씨인 윤증이 살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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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청나라에 고개를 숙이며 패배를 인정한 삼전도의 굴욕 당시 윤증은 실리적으로 옹호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삶 속에서 길을 찾아야 된다고 본 것입니다. 조선시대 당대의 최고의 실력자이며 유학자인 송시열은 22년 대선배이며 스승이었지만 윤증은 실리를 내세우며 대립각을 세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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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 영당의 경승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익공양식으로서, 누마루식으로 조영하였다. 영당은 경승재의 북동쪽에 자리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윤증 사후 1744년(영조 20)에 이르러 윤증 문인들이 스승의 영당과 경승재를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하였습니다. 당초 윤증이 강학했던 강당은 1940년경에 헐리고 주초석만 남아 있으며, 현재는 영당과 경승재, 관리사, 그리고 아래채 등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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