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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백제왕국의 비밀 간직한 왕궁리 오층석탑

부활하는 백제왕국(4)-익산 왕궁리 유적

2015.08.28(금) 21:56:47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익산 왕궁리 유적지’는 백제무왕이 왕궁으로 천도한 곳으로 고대국가에서 왕이 거쳐한‘왕실’과 불교의 안녕을 기원하는‘불교사찰’, 수도방어를 위한‘도성’의 자리가 확인되었다.

▲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익산 왕궁리 유적지’는 백제무왕이 왕궁으로 천도한 곳으로 고대국가에서 왕이 거쳐한‘왕실’과 불교의 안녕을 기원하는‘불교사찰’, 수도방어를 위한‘도성’의 자리가 확인되었다.



백제 왕궁으로서는 처음으로
왕궁 외곽경계·내부구조 확인
 
백제 왕궁의 부엌(廚)터 발굴
일반인들에게 공개돼 관심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
마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신라 진평왕 때 서동왕자 백제 무왕(武王)이 선화공주를 얻기 위하여 궁중 주변의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동요(童謠)이다. 구체로 된 국문학사상 최초의 향가로, 향가 중 유일한 동요로 「삼국유사」에 전한다.
 

익산 왕궁리는 동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이 왕궁을 부여 사비에서 천도한 곳이다.
백제시대 마지막 왕궁이었던 곳이다.(물론 다른 학설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천도설은 일본의 한 사찰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에 나온다. “백제 무왕께서 지모밀지로 천도하시어 새로이 정사를 경영하셨다.” 지모밀지는 익산 왕궁면 일대를 나타내는 옛 지명이다

특히 “정관 13년(무왕 40년) 기해 11월 제석정사의 화재로 법당과 탑 등이 모두 타 버렸으나 탑의 심초에 들어있던 금판경과 사리함 등은 타지 않았고, 다시 그것을 절에 봉인했다.”
이 기록은 지난 1965년 왕궁리 5층 석탑의 해체과정에서 금제사리함과 금은제금강경판이 발견됨에 따라 천도설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한 나라의 수도를 이전하는 천도의 가장 큰 목적은 ‘왕권강화’이다.

당시 무왕은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 권력을 한 곳으로 모으는 정치력이 필요했다.
무왕은 자신의 토착지지 세력인 익산 왕궁리로 왕궁을 이전함으로써 귀족 세력의 힘을 눌렀다.

고대국가에서는 왕이 거쳐하는 ‘왕궁’과 함께 도시계획이 이뤄진 ‘도성’,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불교사찰’, 수도방어를 위한 ‘산성’, 왕의 사후 안식처인 ‘왕릉’이 갖추어져 있다.

이곳 익산 왕궁리 유적지에서는 이런 모든 시설이 확인되고 있다.

면적은 21만6862㎡. 규모는 남북 490m, 동서 245m로 약간 틀어진 긴 네모꼴 모양이다.
위치는 미륵사터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백제 왕궁으로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경계와 내부구조가 확인된 유적이다.
 
●총 21기 건물터 확인

왕궁의 외곽을 둘러싼 담장은 잘 다듬어진 사구석과 장대석, 깬돌을 사용하여 폭 3m규모로 만들었는데, 사람들의 통행이 가장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남측은 잘 다듬어진 사구석과 장대석으로 정성들여 만들었다.

유적지내에서는 총 21기의 건물터가 확인됐다. 백제시대 14기, 통일신라 6기, 고려시대 건물지 1개 등이다. 
왕궁 안으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은 남측 담장에서 연결되어 3개소, 서측 담장에 연결되어 1개소가 확인되었다. 물론 북측과 동측 담장에서도 문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까지 확인되지는 않았다.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왕궁의 남측에 3개의 문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다.

정전건물지를 비롯한 14개의 백제 건물지와 백제 최고의 정원유적, 금·유리·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지가 확인됐다. 우리나라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화장실 유적과 왕실 부엌인 수라간 유적이 확인되어 왕궁의 축조과정과 생활 내용을 파악하는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또 담장의 아래 안쪽과 바깥쪽에는 폭 1m 정도로 편평한 돌을 깔아 물에 의해 담장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고 보도로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대형 화장실은 토광을 파고 나무기둥을 세워 발판을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내부에서 회충, 편충 등의 기생충알과 현재의 화장지와 같이 사용되었던 뒤처리용 막대기가 출토되었다.

위치는 왕궁의 중심시설과는 별도로 공방지 주변에서 확인됨에 따라 공방과 관련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위생적인 뒤 처리를 위해 설치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왕궁 부엌터 발굴돼
지난 20일에는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에서 백제 사비기 왕궁의 부엌(廚)터가 발굴돼 일반인들에게 공개됐다. 수라간 크기는 동서 6.8m, 남북 11.3m 규모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배병선)가 26년째 발굴조사 중이다.

타원형 구덩이에서는 철제솥(鐵釜, 철부) 2점과 함께 어깨가 넓은 항아리(廣肩壺, 광견호) 2점, 목이 짧고 아가리가 곧은 항아리(直口短頸壺, 직구단경호) 1점, 목이 짧은 병(短頸甁, 단경병) 2점 등 토기 5점과 숫돌 3점이 발견됐다.

바로 옆 바깥에서는 철제솥 1점이 별도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구덩이 옆에는 불탄 흙과 검붉게 변한 벽체(壁體), 다량의 숯이 바닥면에 깔려 있는 지점 두 곳도 확인됐다.

철제솥은 원형 돌기가 달린 바닥에 어깨에는 넓은 턱이 있고 아가리는 안쪽으로 살짝 휘어져 있다.

왕궁리 유적은 우리나라식 정원 경관과 조경기술의 탁월한 사례로 손꼽히는 곳이다.

백제 후기인 사비시대의 왕궁터로 알려진 왕궁리 유적지의 정원은 당시 불교와 유교 그리고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조성됐다.

풍수설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인 계단식 후원인 ‘화계(花階)’도 역사 문화적 가치가 독보적인 유적지이기도 하다.

중국식과 일본식 정원이 혼성돼 하나의 독특한 양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왕궁터 정원의 발견은 당시 중국-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정원문화의 교류 양상과 함께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원 유적은 왕궁의 후원과 연결되는 부분에 기이한 괴석과 장대석, 하천석 등을 조합하여 물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정원 주변에 정자와 같은 건물지와 제4석축 위로 연결되는 도로도 조사되었다.
●왕궁리유적전시관 063-859-4631
/김태신 ktx@korea.kr
 

왕궁리 5층석탑

▲ 왕궁리 5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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