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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세계문화유산 다음 등록지 후보인 '돈암서원'을 찾아서

2015.07.13(월) 12:42:36 | 조연용 (이메일주소:whdydtnr71@naver.com
               	whdydtnr7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됨에 따라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시점이다. 옛말에 ‘내친김에 쉬어가자’는 말도 있으니 이참에 백제역사유적지 다음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문화유산 후보는 어디일까?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에 이어 ‘세계문화유산’ 후보 잠정 목록에 올라와 있는 곳은 바로 ‘서원’이라고 한다. 2016년에 우리나라 서원들이 다시 한 번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논산에 있는 ‘돈암서원’을 찾았다.
 
그런 먼저 ‘서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짚고 가는 것이 옳을 듯 싶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기구였다.
 
서원의 기원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이후 송나라 때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고 도학연마의 도장으로 보급한 이래 남송·원·명을 거치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이다.
 
조선의 서원은 그 성립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기능과 성격 등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중국의 서원이 관인양성을 위한 준비기구로서의 학교의 성격을 고수하였다면 조선의 서원은 정치적·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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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에 대한 기초 지식을 장착했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돈암서원’을 둘러볼 시간이다.

돈암서원 창건 이전에는 연산면에 김장생의 아버지인 계휘(繼輝)가 설립한 경회당(慶會堂)이 있어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된바 있었다. 또 김장생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돈암서원은 1634년 인조 12년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사계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현재 위치에서 1.5km 떨어진 숲말에 양성당과 경회당을 중심으로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 후 현종 1년(1660년)에 ‘돈암(遯巖)’이라는 사액서원(사설기관인 서원의 역할이 국가의 정책에 연결되면서 국가의 공인을 받아 서원명, 현판(懸板)과 노비·서적 등을 하사받았던 서원)으로 승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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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의 본래 자리에 돼지를 닮은 ‘돈암’ 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의 이름을 따서 돈암서원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대가 낮아 홍수 때마다 물이 뜰까지 넘쳐 들어오는 바람에 고종 17년(1880)에 현재의 자리인 임리 74번지(서원말)로 옮겨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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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잠깐 흥선대원권의 서원철폐령이란 1871년(고종 8년) 서원의 오랜 적폐(積弊)를 제거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서원에 대해 내린 일대 정리 명령으로 전국에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통폐합한 조치이다. 비사액서원을 우선적으로 정리를 하였고, 사액서원이라도 불법을 횡행하는 서원은 모두 철폐되었다.

돈암서원에는 사적 제383호 _ 논산 돈암서원  보물 제1569호,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 _ 논산 돈암서원 충례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 -_ 돈암서원 원정비, 충청남도 향토유적 제9호 _ 돈암서원 장판각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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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산앙루가 손님을 맞아준다. 산앙루는 북쪽으로는 계룡산줄기와 남쪽으로는 대둔산의 줄기가 흘러와 마주치는 길지에 세워져 산을 바라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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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응도당이다. 응도당은 학문을 연구하고 강론하던 강당으로 최근에 보물 제1569호로 지정되었다. 응도당은 현존하는 서원 건물 중 유일하게 고대 예서에서 말하는 하옥제도(廈屋制度)를 본받아 지어진 건물이라는 것이 보물 지정의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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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에서 가장 빼어난 건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곳이 응도당이다. 응도당은 다른 서원 건축양식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구조로서 바로 양 옆면에  지붕하나를 덧댄 가첨지붕(눈썹처마) 구조와 지붕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기둥을 받치고 서 있는 용무늬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뭔가 대단한 인물들이 배출될것만 같은 용의 기운이라고나 해야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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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다랗게 펼쳐진 마루를 보고 있자니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것만 같다. 오랜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간직한 마무빛깔에서 예학의 향취가 풍겨나온다.

김장생은 조선 예학의 태두(泰斗)이며 기호학파의 적통이었다. 기호학파는 조선 중기 畿湖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이율곡, 성혼학파를 통칭한 말이다. 특히 기호학파는 이율곡의 제자였던 김장생을 거쳐 송시열에 이르러서 정계,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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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정의재, 양성당, 거경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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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 366호로 지정된 원정비이다. 원정비에는 서원을 세우게 된 내력과 서원의 구조 그리고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인 신독재의 업적과 학문과 업적에 대해 적고 있다.

이 비는 1699년에 세워졌고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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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자세한 의의라는 뜻으로 정의재는 학문을 하는 유생들이 모여 경전의 의의를 자세히 강론하던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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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이 창건되기 이전 사계 선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휘 선생께서 강학하던 건물이다.1557년(명종 12) 대둔산 고운사 경내에 설립하였다. 정면4칸, 측면 2칸으로 후면 열 가운데 2칸은 마루방으로 지어져 있다. 고운사 터에서 1954년에 옮겨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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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당과 장판각 사이 쯤에 있는 향나무다. 건물들만 서 있는 한 가운데에 향나무가 서 있어서 뭔가 생동감이 느껴지고 이 자리에 향나무가 있어야할 특별한 이유가 있을것만 같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서원에는 공통적으로 향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유는 서원과 향나무는 같은 연대를 나타내기 때문에 심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향나무와 서원의 나이가 같다고 봐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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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어 있는 장판각이다. 장판각은 정면3칸, 측면2칸에 내부는 모두 마루로 되어 있고 무고주 5량집구조로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져 있다. 기단은 장대석 외볼대로 하고 덤벙주초를 넣은 다음 두리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장판각에는 <사계서원> <신독재 전서> <화강실기> <가계유고> <신독재유고> 등과 같은 목판과 김장생. 김집. 김계휘의 문집과 왕실의 하사품인 벼루. 전적 등과 책판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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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사는 문이 잠겨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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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특이하게 담장에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한 컷 담아봤다. 집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숭례사 담장에 쓰여진 글귀는 김장생과 그의 후손들의 예학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12개의 글자를 새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지부해함, 박문약례, 서일화풍으로 地負海涵(지부해함)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 주듯 포용하라.',  博文約禮(박문약례)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瑞日和風(서일화풍)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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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다 보니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을 돌담이 눈에 들어온다. 긴 세월동안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돈암서원의 역사를 지키고 서 있었을 돌담에도 마음 한 자락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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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는 배롱나무다. 돈암서원 입구에 서 있던 나무인데 들어갈때는 유심이 못봤는데 나오다보니 눈에 들어왔다. 얼마지 않아 분홍색 꽃송이들이 활짝 피어나겠지.

그때 다시 꽃보러 오고 싶다는 마음을 한 자락 내려놓고 돈암서원을 돌아나오면서 2016년에 우리나라 서원들이 꼭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행복한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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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 사적 제383호 (1993년 10월 18일), 건립시기 1634년
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
홈페이지: www.donamseow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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