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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조선시대 최대의 사학, 종학당

한 곳에서 40여명 이상의 과거 급제생을 낸 학문의 전당

2015.06.23(화) 17:19:02 | 조연용 (이메일주소:whdydtnr71@naver.com
               	whdydtnr7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치 통조림도 아닌데 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거야!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장소들을 머릿속에서 떠 올리다가 그동안 미뤄두었던 노성에 있는 종학당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종학당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벌써 9년전이다. 

잠깐동안 TJB '테마기행' 구성작가로 일했던 2006년 첫 작품으로 '고택'을 다룬적이 있었다. 그때 첫 방문지가 노성에 있는 윤증고택이었는데 그때 처음 명재 윤증선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것으로 기억한다. 윤증 고택에 대해서 자료 조사를 하던 중 종학당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흘러 벌써 9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참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종학당' 방문의 날. 노성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윤증 고택을 다시 한번 휘 둘러본다. 비교적 자주 찾아왔던 윤증고택인데도 방문할 때마다 윤증 고택 한 켠에 있는 장항아리들에 자꾸만 눈이 간다. 동글동글 예쁘고 정겹기만 한 장항아리들. 녹음을 배경으로 놓여있으니 한층 더 그 자태가 곱게 느껴진다.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1


종학당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명재 윤증 선생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명재 윤증선생은 전통적으로 서인의 명문가 중 하나인 파평 윤씨 출신으로 신독재 김집과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하지만 아버지 윤선거의 절친이자 윤증 자신의 스승인 송시열과 ‘회니시비(懷尼是非)’ 로 갈라서게 되면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서게 된다.

송시열과 갈라선 이후 윤증은  소론의 영수가 되어 송시열과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을 빚었다. 주자학 일색(一色)의 사상과 노론의 일당(一黨) 독재에 비판적이었던 그의 견해는 18세기에 등장하는 소론 출신의 진보적인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윤증은 일찍부터 주자학 이외의 모든 사상과 학문을 이단(異端)으로 모는 송시열 등 노론 계열의 독선과 아집 그리고 보수성과 폐쇄성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맞서 싸웠다.

이 때문에 스승을 배반한 패륜아라는 공격까지 받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윤증은 죽을 때까지 선비의 길과 학문의 도리를 오직 ‘명덕(明德)을 밝히는(明) 것’에서 찾았을 뿐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임금이 스무번이나 벼슬을 하사했는데도 끝내 사양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윤증고택은 윤증(尹拯)이 초라한 집에 기거하자, 이를 보다 못한 제자들이 추렴해서 1709년에  지은 집이다. 그러나 윤증이 돌아가기 5년 전에 완공했지만, 윤증은 과분하다며 끝내 살고 있던 초가집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벼슬을 거부한 인품과 초가집에 머물렀던 청빈함 그리고 노론 계열의 독선과 아집, 보수성과 폐쇄성을 정면으로 박반한 것들로 보아 윤증의 삶은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의 목적지인 종학당으로 고고씽!

종학당은 윤증고택에서 차로 이동했을 때 멀리 않은 곳에 있었다. 종학당이 1997년 12월 23일에 충청남도에서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한 문화재라는 사실을 필두로 학습모드로 진입해 보기로 한다.

종학당은 파평윤씨 종중의 자녀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까지 합숙·교육시키기 위해 동토 윤순거(1596~1668)가 설립한 문중서당으로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신교육제도의 도입전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16세기 중반에 지금의 노성(니산)에 터를 잡은 파평윤씨 일가가 빠른 시일 내에 조선의 명문가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종학당의 문중 교육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창건 후 340여년간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학문의 요람으로 노성 파평윤씨 가문의 문과 급제자 46인의 다대수가 이곳으로 출신이라고 하니 정말 대단한 명당 중에 명당이 아닌가. 조선 600년 역사상 한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과거에 40명이상 배출된 사례는 이곳이 유일할 정도라고.

설립 당시의 종학당은 현재의 위치에 백록당(白鹿堂)과 정수루(淨水樓), 그리고 승방인 정수암(淨水庵) 등 세 채의 건물을 지어 규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이곳은 과거 준비는 물론 강학과 학문토론의 장소로 이용되었고, 특히 교육은 일반 서원이나 서당과 달리 파평윤씨 종학(宗學)의 규칙과 규율 속에서 이루어졌다. 종학의 전통은 윤증 때 이르러 더욱 활발하게 운영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2

입구에 서 있는 홍살문을 지나오니 고풍스런 자태를 자아내는 3칸 솟을대문이 방문객을 맞아준다. 내삼문 안으로 한 발짝 들여놓으려니 사극에서 보았던 책을 들고 서당으로 향하던 도령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양반가의 도령이 되어 서당으로 글 공부하러 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종학당 내부로 발길을 옮겨본다.

종학당 건립 당시 윤순거는 파평 윤씨 문중 자제의 교육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종제 윤원거, 아우 윤선거와 함께 종약 및 가훈을 제정하고, 파평윤씨 종학당을 건립하고 책, 기물, 재산 등을 마련하여 윤순거 자신이 초대 당장이 되어 초창기 학사 운영의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옛 선비들의 고매한 학습 풍경속으로 빠져 볼 시간이다.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3

가장 먼저 정수와 백록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도심 아파트 단지의 풍경들과 한 눈에 대조되는 저 고풍스런 자태라니... 오랜만에 내 눈이 호강을 할 판이다.

순간 떠오른 생각 하나! 이렇게 경치좋고 멋진 곳에서 공부한다면 저절로 학문이 머릿속으로 쏙쏙 들어와 쌓일것 같은 기분이라니... 많이 아주 많이 늦었다고는 생각하지만 지금이라도 이곳에 와서 고시 공부를 하면 단박에 붙을것 같은 기분이다.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4


백록당은 현재 교육수준으로 치면 중등과정에 해당되는 교육을 실시했던 곳으로 수준별 학습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개인 과외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백록당은 과거 준비는 물론 강학과 학문토론의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종학당의 교육은 일반 서원이나 서당과 달리 파평윤씨 종학(宗學)의 규칙과 규율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初學畵一之圖와 爲學之方圖에서 알 수 있듯이 명재 윤증때에 이르러 더욱 활발히 운영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5

1628년 어간에는 현재의 위치에 백록당(白鹿堂)과 정수루(淨水樓), 그리고 승방인 정수암(淨水庵) 등 세 채의 건물을 지어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전한다. 

종학당은 1987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293호로 지정되었다가 1915년 대화재로 백록당과 정수루 일부가 불에 타서 소실된 것을 1999년에 종학당, 2000년에는 정수루를 각각 원형 복원했다고 한다.  또 이를 계기로 2001년에 강당인 보인당과 함께 이 일원을 종학원으로 통칭하고 있다.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6

정수루는 누각과 서재가 있어 선비들이 학문을 토론하며 시문을 짓던 장소였다.
 
파평윤씨 정수루 정면 중앙에는 정수루(淨水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좌우로 향원익청(香遠益淸), 오가백록(吾家白鹿)이란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7

밖이 훤히 내다 보이는 구조가 가슴까지 시원하게 해 준다. 이런 곳에서 앉아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지었다니 누구라도 시인이 안 되고는 못 배길 장소가 아닌가? 

온갖 피로와 스트레스에 찌든 현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한 이틀만 머물다 가면 금방이라도 몸과 마음이 정화될 것 같은 누각이다. 한 마디로 좋아도 너무 좋다.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8


정수루에 걸려있는 글귀인데 워낙이 한자가 많아서 독해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잘은 몰라도 학문에 대한 독려 같은 교시가 씌어져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해 보면서 시선을 밖으로 돌려본다.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9

너무 멋지다. 저 풍경을 보고 어찌 시가 나오지 않으리오!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10

정수루 바로 앞에 있는 정수암이다. 
곧 베롱나무가 꽃을 팔짝 피어 연못을 환하게 밝힐 날이 멀지 않아 보였다.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11

이곳은 강당으로 쓰였다는 보인당이다. 문틈 사이로 내부를 빼꼼히 들여다보니 누군가 공부를 하고 간 흔적들이 군데 군데 남아있다. 사각상들이 여러개 펼쳐져 있고 이것 저것 뒹굴어 다니는 모양새다.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12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13


보인당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풍경이다. 그 옛날 파평 윤씨 종중의 화려했던 명성을 현대에 다시 한 번 깨워내려는 듯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풍경을 흔들다 간다. 

어쩜 먼 옛날 종학당에서 학문을 닦았던 선비의 마음이 풍경에 와 닿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시 쓸쓸한 감회에 젖어 들었다.

조선시대 명문가의 학문의 토대가 되었던 이렇게 멋진 곳을 왜 이렇게 방치해 놓고 있는 것일까? 왠지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듯한 느낌을 사뭇 지워낼 수 있는 기분이라니...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14

이곳을 문화예술의 산실로 가꾸어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면서 종학당을 돌아나오다 보니 올라갈때 제대로 보지 못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조선시대최대의사학종학당 15


2008년 10월 2일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와!~ 구 소련 대통령까지 다녀갈 만큼 의미있는 역사적인 문화재였다니 내가 고르바초프 대통령보다 한 참이나 늦게 종학당을 찾았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이 스쳐갔다.

좀 늦긴 했지만 이제라도 종학당을 둘러봤다는  위안을  가지면서도 못내 종학당이 방치되어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달랠길 없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종학당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니 간혹 종학당에서 문화행사가 이루어지고는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좀 부족한듯 싶고 좀더 본격적으로 종학당의 활용 방안에 대해서 고민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예술인들을 위한 레지던트 사업 공간으로 활용해도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면서 종학당에서 학문의 기를 받아왔으니 미뤄둔 직업상담사 2차 실기 공부에 매진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위치: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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