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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친정집 고추밭에 '불'이 났어요

2013.07.29(월) 15:08:07 | 이영희 (이메일주소:dkfmqktlek@hanmail.net
               	dkfmqktlek@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찌찌찌 찌르르르, 찌찌찌 찌르르르, 또르뜨 또르르뜨... 또또또르르”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의성어 의태어 공부 열심히 했건만 한여름 시골 밤을 수놓는 풀벌레 노랫소리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땅히 표현할 방도가 없네요.

 자연의 소리는 아무리 우리 언어가 훌륭하다 해도 결코 흉내내기 힘든 희한한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옥수수 찌어 까 놓고, 마당엔 모깃불 피워 놓고 밤하늘의 별을 세며 깊어 가는 여름날 시골에서의 하룻밤을 지새는 일. 이건 생각만 해도 몸과 마음이 파란 하늘 혹은 푸르른 초원에서 노니는 그런 기분입니다.

 그렇게 노래하기 시작한 풀벌레들은 오랜만에 친정에 들른 시집 간 나이 든 딸내미를 위해 밤새 시골집 주변에서 놀아 주었답니다. 고맙게도 동이 트는 시간에서야 멈추었고요. 내겐 너무나 익숙하고 푸근한 자장가였습니다.

"엄마, 뭐 일할거 없어요?”
아침 밥을 먹고 나서 엄마 농삿일 좀 도와드릴 생각에 밭 맬 일이라도 있는지 묻자 엄마는 고개를 젓습니다.

 “너는 참... 부지런도 떤다 야. 이 뜨거운 폭양에 뭔 일여 일은. 일 할라믄 벌써 일어났으야제.”

 아하... 그랬습니다. 한여름에 한낮에는 일을 못합니다. 너무 뜨거워서. 그래서 아버지 엄마도 한여름에 농삿일을 할때는 동트기 훨씬 전 여명이 밝아올 무렵 논밭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러네. 딸이 너무 게을러서 호호호.”
 멋쩍게 웃자 엄마가 고추 밭에나 가자며 소쿠리를 집어 드십니다. 붉은 고추를 좀 따다가 열무김치를 담그시겠다며.

 엄마의 몸빼 바지로 갈아 입고 뒷산 마을 중간쯤에 있는 고추밭으로 가서 보니 고추가 내 키의 허리춤만큼 자라 있습니다.

친정집 고추밭

▲ 친정집 고추밭


 “올해는 고추가 조금 실허다. 병도 잘 안먹고.”
 엄마의 대답이 시원시원합니다. 고추 농사가 아직까지는 잘되어서 성공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어쩜 고추농사를 이렇게 잘 지어놓으셨을까요. 고추가... 고추가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거의 오이만합니다.

크고 잘 생긴 고추

▲ 크고 잘 생긴 고추
 

마치 고추밭 바닥에 불이 난듯...

▲ 마치 고추밭 바닥에 불이 난듯...
 

고추가 과장해서 말하면 오이 만하게...

▲ 고추가 과장해서 말하자면 오이 만하게... 병충해도 없이.


 덕분에 고추밭은 불이 났습니다.
 생각해 보니 지난 봄에 고추 모종 사다가 검은 비닐하우스를 고랑마다 깔아 흙으로 덮고, 그 위에 구멍을 일일이 뚫어 고추 한포기씩 집어 넣어 심은 기억이 납니다. 그땐 남편도 와서 한몫 거들었답니다. 고춧가루 얻어 먹으려고요. 호호호.

잘 깔아준 볏집. 그리고 이쪽은 조금 늦게 심은 탓에 아직 덜 익어 푸릇푸릇한 고추.

▲ 잘 깔아준 볏집. 


 바닥엔 수분 날라가지 말고, 풀도 덜 자라라고 짚을 깔아 주었죠. 지난 가을 농사때 베어 놓은 볏단을 풀어 짚을 깔아 줄때도 먼지는 얼마나 폴폴 날리던지.
 하지만 그런 먼지는 조금 먹어도 싫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때는 고소합니다. 저도 천상 농촌의 딸내미가 맞습니다.

 그리고 봄 가뭄에 고추 말라 죽지 말라고 주전자에 물을 떠다 한포기 한포기 일일이 물을 부어주었죠.
 그 고추나무가 이제 내 키만큼 자라 밭에 ‘불’을 내었습니다.

 

친정집고추밭에불이났어요 1

▲ "나도 빨리 익고 싶어!"라며 햇빛을 열심히 머금는 중.
 

그리고 이쪽은 조금 늦게 심은 탓에 아직 덜 익어 푸릇푸릇한 고추.

▲ 그리고 이쪽은 조금 늦게 심은 탓에 아직 덜 익어 푸릇푸릇한 고추.


 “엄마, 고추가 정말 너무 커요. 와, 굉장하다”
 “사나흘 더 있으믄 고추 딸 참이다. 그날 비 안 오믄 후딱 따서 해치워야제. 증말 날이 맑아야 할텐데. 요세는 근 며칠동안 햇볕 드는 날이 드물었다. 어떤때는 장대비도 내리더라.”
 엄마의 희망사항이십니다. 고추 따는 날, 맑아야 따기도 수월하고 장에 내다 팔아도 제값 받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추밭에 들어가 만져 보았습니다. 병도 안 먹고 탱탱하게 살이 오른 붉은 고추들. 과일 같으면 그냥 한잎 쑥 베어먹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잘 생겼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시골 생활을 하면서 농삿일에 대해 웬만큼 알고는 있지만 고추가 이렇게 크게 잘 생긴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아니, 내가 그동안 결혼해서 도시에 나가 살면서 너무 오랫동안 시골 농삿일을 잊고 지내서인가요? 하여튼 고추 밭에 불이 났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엄마, 다 때려 치고 고추 장사 해도 되겠어!”

 오이만한 고추, 불이 난 고추밭을 보면서 흥분한 내가 호들갑을 떨자 엄마는 그저 웃고 맙니다. 농삿꾼은 하늘의 뜻에 맞추어 모든걸 결정 받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분이기에 욕심도 없습니다.

 오랜만에 개인 하늘 아래 커다랗게 잘 자란 고추밭에서 엄마와 함께 ‘똑, 똑’붉은 고추를 따는 손맛은... 정말 행복감 그 자체였습니다.

 엄마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에 작게 맺힌 땀방울이 유난히 반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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