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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길목을 지키던 신창학성산성

2020.06.02(화) 16:28:29아산지기(isknet@hanmail.net)

백제의 길목을 지키던 신창학성산성

해설: 이갑수(향토문화연구사)
여기가 성문자리예요.
성문자리 성문을 복원해야 되는데,
예산이 부족해서 여기까지만 하고 말았어요.

지금 나무들이 자라가지고 마을 풍경을 볼 수가 없는데, 전에 나무들이 작았을때는 여기서 오면은 마을풍경이 싹 내려다 보였어요.

여기 성을 다시 쌓은 거죠?

성을 다시 쌓았습니다.
쌓은 지가 얼마 안 됐어요. 여기도 돌들을 다 농민들이 빼다가 자기 집 축대쌓고, 논둑 쌓고 그랬어요.

그래서 다 허물어진것을 복원한 거예요. 이 산성이, 지금 설화산이 여기, 똑똑히 보이는 것이
설화산이에요. 이쪽은 배방산이고 두 번째 12시 방향이 설화산입니다. 아산에 인물들이 날려면은 저산을 바라보고 자라던가 등지고 자란 분이 우리 아산의 인물이 되었어요.

이 마을 구조를 보면은 산맥이 저 설화산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산맥이 이렇게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다시 설화산을 바라보는
그런 형상을 하고 있지요. 요런 자리가 명당이에요.

그래서 두 산이 있는데 그 산을 중시으로 해서 산맥이 돌아가지고 그 산을 바라보는 그런 위치, 그런 게 좋은 터예요.

그래서 풍수지리서에도 그런 말이 나오는데, 그런 자리가 말이죠, 그리고 이 마을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잘되는 마을이에요. 왜냐면은 우백호가 산을
갖춰서 앞산까지 연결이 되었단 말이에요.

우백호가 이렇게 강한 마을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여자들이 더 장수하고 여자들이 잘 돼요. 그래서 정현왕후 같은 왕비도 나오지 않았는가 하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봐요.

저희 어렸을 때만 해도 이마을이 산이 뺑 둘러 있어가지고 농지가 별로 없어요. 그러다 보니 먹을것이 별로 없어 가난하게 살던 마을이에요. 저도 이 마을에서 태어나서 이 마을에서 자랐는데, 제가 온양중학교를 다녔는데 여기서부터 새벽에 6시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6시 30분에
서 7시에 출발을 해서 학교까지 걸어갔어요.

3.1운동 당시에 여기서 만세운동을 시작을 했어요.
마을에 내려가서 경찰주재소가 있었는데, 주재소에 돌을 던져가지고 유리창을 다 깨버렸어요.

그렇게 가지고 또 학교에 교장 관사가 있었어요. 그 교장 관사도 돌을 던져가지고 유리창을 다 깨놓고
그랬어요. 그렇게 해서 3.1만세운동이 바로 학성산에서 마을주민들에 의해 주도가 되고 아주 크게 일어났던 그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에 도주해 가지고 함경도인가로 도망간 사람은 안 잡혔어요.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는 안 잡히고 나머지는 다 잡혀가지고 실형도
살고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이 산성에서 보면은 나무들이 안 자랐을 때는 전망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나무들이 자라서 나무에 가려져서 조망이 망가졌는데요. 여기에 요자리에 선돌이 있었어요.

선돌이 돌을 세워져 있는것이 있었는데 요 아랫마을 사람들이 그 돌을 깨서 버렸어요. 그 깨는것을 제가 목격을 했어요.

제가 그돌에 올라가서 놀기도 하고 그랬는데 나보다 나이도 많고 난 쪼그만했을 땐데 그사람 보고 왜 깨요, 그랬는데 그 사람들이 말을 안 듣더라구요 그래서 의미있는 선돌이
깨서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바위가 있는데
여기가 돗자리를 깔았던 흔적이 있는 바위가 있었어요. 요 바윈가 그럴 거예요. 아마 바닥에 돗자리 문양이 있어요.

옛날에 여기 신창현을 관할하는 데가 선장 쪽까지 관할을 하는데, 옛날에 그래도 쌀이 많이 났어요.

선장평야, 신창평야 그런데서 그렇게 해서 공출이라고 하죠. 세를 받아가지고 배를 통해 가지고 아산만으로 해가지고, 한양으로 옮겨가는 그런 그 역할을 했어요.

그래서 호남에서 오던 쌀도 일부 놓아두었다가 서울로 가져가는 그런 길목이었어요. 홍곳리인가 그쪽에 창고가
있었습니다.

그곳을 관할하고 신창현에서 담당을 했을 거예요. 그래서 이쪽에서 보면은 도고산도 보이고 저쪽에 설화산도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설화산을 중심으로 해서 신창 학성까지 벨트형태로 해가지고 구온양에 읍내동 뒤에도 성곽이 있었습니다.

이쪽 벨트로 해서 방어진지 역할을 했던 것이고 영인산성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물한산성, 꾀꼬리산성 해가지고 탕정까지 이어지는 그렇게 해서 성곽이 있어 가지고 백제시대 곡교천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양쪽에 진지를 구축해 가지고 있었던 곳이기도 해요.

백제 초기에 그 이쪽이 백제가 정착하는 그런 곳이었지 않았는가 생각이 되고 지난번에 설명을 드렸듯이 배방산성이 탕정성이었다고 말슴을 드렸잖아요.

탕정성은 온조왕 36년에 쌓은 성이에요. 그래서 온조왕 36년은 서기 18년이에요. 그래서 온양온천의 역사는 2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양온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온천이고 지금까지 최상급의 온천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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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1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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