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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평 전투, 연이어 빛나는 승전

청산리전투 100주년·김좌진장군 서거 90주년기획⑩일본군 기마부대를 전멸시킨 천수평 전투

2020.07.27(월) 18:11:51도정신문(ktx@korea.kr)


청산리대첩 당시 독립군이 사용했던 무기  /출처 독립기념관

▲ 청산리대첩 당시 독립군이 사용했던 무기 /출처 독립기념관



천수평 일본군 주둔 정보 입수
김좌진, 날 밝기 전 기습공격
日기마부대 말부터 집중공격
승전 후 다시 어랑촌으로이동

 
김좌진은 청산리대첩의첫 전투인 백운평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화룡현 갑산촌(甲山村)으로 이동했다.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해 궤멸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일본군 지원부대가 도착하면전세가 불리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갑산촌은 백운평에서 100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대한군정서군은 전투를 하느라 온종일 굶었음에도 나무열매로 허기를 때우며 10월 22일 오전 2시경 갑산촌에 도착했다. 갑산촌의 한인동포들은 식사와 함께 30여 리 떨어진 천수평에 일본군 기마부대가 주둔한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김좌진은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열었다. 일본군이 인근에 주둔하고 있어 갑산촌이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전회의 결과는 선제공격이었다. 치열한 전투 이후 100여 리나 행군한 상황에서 휴식도 없이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김좌진은 날이 밝기 전에 일본군을 기습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여겼다.

대한군정서군은 또다시 30여 리를 이동해22일 새벽 4시경 천수평 외곽지대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보초병력을 제외하고 말을 매어 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대한군정서군은 퇴로를 차단하고일본군을 포위하고 새벽5시 30분경 일제히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이 기마부대인 점을생각해 말부터 집중해 공격했다. 잠들어있던 일본군은 허둥대며 무기와 말을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한군정서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은 중대장을 비롯해120여 명(추정)이전멸했다. 대한군정서군은 전사 2명, 경상 17명 정도였다. 백운평전투에 연이은 빛나는 승전이었다.

승전의감격도 잠시, 김좌진은 또다시 화룡현 어랑촌(漁郞村)으로 이동해야 했다. 천수평전투에서획득한 문서를 통해 일본군이 어랑촌에 집결해 있다는 사실을파악했기 때문이다. 어랑촌에는 보병ㆍ기마병ㆍ포병을 포함해 일본군 1,5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김좌진은 천수평전투와 같이 선제공격해야 한다고 여겼다. 화력이우세한 일본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선제공격이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김좌진은 대한군정서군을 이끌고 청산리대첩의최대의 승전지 어랑촌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성우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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