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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 투쟁의 성지 ‘홍주의사총’

병오항일의병 당시 전사한 의병의 유골 합장 분묘

2020.07.16(목) 09:06:36 | 홍주신문 (이메일주소:uytn24@hanmail.net
               	uytn24@hanmail.net)

항일의병 투쟁의 성지 ‘홍주의사총’ 1 

 

홍주의사총은 1906530~31일 홍주성전투에서 일본군에 희생된 홍주의병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다. 이곳의 창의사에는 이때 희생된 900의사의 위패를 봉안했다. 본전은 건평 14.7평이고 삼문이 설치돼 있다. 900의병의 유해가 묻혀있다 해서 홍주구백의총이라 부르던 명칭을 1992홍주의사총으로 바꿨다. 2001817일 사적 제431호로 지정됐다.
 

조선말기인 병오년에 홍주지역에서 있었던 의병운동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희생된 홍주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홍주지역에서 일어난 1906(병오년)의 홍주의병 봉기는 3월의 제1차 봉기와 5월의 제2차 봉기로 구분된다. 1차 봉기는 이설과 김복한이 중심이 돼 계획했다. 을미사변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이설은 을사늑약 체결 직후 김복한과 함께 상경해 늑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경무국에 수감돼 옥고를 치르게 됐다.
 

19062월에 석방돼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봉기를 계획하고, 을미의병 동지였던 안병찬, 을미사변 이후 청양에 낙향해 있던 이조참판 민종식이 채광묵, 박창로, 이세영 등과 연락해 의병부대 편성에 착수했다. 315일경 예산 광시장터에서 1차 봉기했다. 창의대장 민종식 휘하에 모인 의병의 규모는 300~600여명 규모로 이들은 홍주성을 점령 활동거점으로 삼기 위해 광시를 떠나 홍주성으로 진격했지만 점령에 실패하고 청양 화성의 합천에 머물게 된다. 이후 317일 새벽 일제 헌병의 공격을 받아 안병찬, 박창로, 윤자홍 등 20여명이 체포되면서 의병부대는 해산되고 만다. 이로써 제1차 홍주의병은 의병부대 결성 후 해산할 때까지 불과 2~3일에 지나지 않아 실패한다.
 

2차 봉기는 민종식이 주도했다. 합천전투에서 탈출한 의병장 민종식은 전주의 친척집에서 재기를 모색했다. 이때 처남인 예산 대술의 이용규가 의병을 모집하고 식량을 준비하는 등 역할을 했다. 512일 홍산군 지티(지금의 부여 내산면 지티리)에서 민종식은 400여명의 의병과 함께 재봉기함으로써 제2차 홍주의병이 시작됐다. 이번에도 홍주성 점령을 목표로 삼고, 513이 홍산을 떠난 의병부대는 남하해 서천을 점령하고, 다음날 비인을 점령하면서 남포를 공격한다. 남포읍성은 4일 만에 점령됐고 이때 1000여명으로 불어난 민종식 홍주의병은 519일 홍주성을 포위 공격했다. 의병부대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한 일본군과 관군은 홍주성 북문을 통해 달아났다. 홍주성 탈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식, 채광묵 등 지방의 명망 있는 유생들이 의병을 모아 홍주의병은 총포로 무장한 의병 600여명, 창을 가진 의병 300여명, 유회군(양반 유생) 300여명 등 1200여명이 달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군이 525일부터 홍주성의 의병부대를 몇 차례 공격하더니, 531일 새벽 230분부터 일본군의 홍주성 공격이 시작돼 오전 6시에 홍주성은 일본군에 점령당했다. 일본군은 홍주성을 점령한 후 의병들을 처참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80여명이 사망하고 150여명이 체포된 것으로 일본군은 전과를 기록하고 있다. 홍주의병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참모장 채광묵 부자를 비롯해 300여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다.
 

홍주성전투 직후 홍주군수로 부임한 윤시영의 홍양일기(洪陽日記)에 의하면 일본군은 의병을 추격해 사살 했으며 심지어는 체포된 의병을 작살하는 잔인한 직을 저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때에 일본군 대포에 의해 조양문이 부서졌고 중과부적으로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해 시체가 대교리 일대의 냇가와 남산일대에까지 흩어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때의 유해들이 홍성천과 월계천 주변에 묻혀 있다가 발견된 유골이 지금의 홍주의사총에 묻혀 잠들어 있는 홍주의병들의 유골이다.
 

194945일 홍성군수 박주철과 홍주경찰서장 박헌교가 직원들을 인솔하고 현재 의사총이 있는 홍성천 부근에서 식목행사를 진행하던 중 의외로 많은 유골이 발견돼 옛 노인에게 설명을 들으니, 병오항일의병 당시 전사한 의병군의 유골이 임시 매장된 것으로 판명됐다. 충청남도에 그 사실을 보고하고 도비를 지원 받아 유골을 모아 이곳에 합장해 분묘를 조성하고 구백의총(九百義塚)’이라 불렀다. 합장분묘를 조성할 당시 족히 900명은 된다고 판단해 구백의총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모습으로 성역화 했다. 1992년 구백의총(九百義塚)이란 이름이 홍주의사총으로 바뀌었으며 한동안 주민들은 홍주구백의총이라 부르기도 했다. 해마다 530일에 순국 의사에 대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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