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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군율 속 실전위주 교육

청산리전투 100주년·김좌진장군 서거 90주년기획 ⑦ 청산리 대첩의 영웅들을 양성하다

2020.06.25(목) 18:15:15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ktx@korea.kr
               	ktx@korea.kr)

사관연성소 졸업식 모습

▲ 사관연성소 졸업식 모습



김좌진 사령부 책임 맡아
독립군 간부 양성 주력
역사학, 전술 등 사관교육
무기운반대 파견 무기 구입
총기, 수류탄 등 전투력 갖춰

 
김좌진은 대한정의단에참여한 후 사령부책임을 맡았다. 사령부는 군사기관이었으며 사령관 김좌진이 전담했다.

대한정의단은 김좌진이참여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령으로대한군정서로 개칭하고임시정부 군사기관 소속으로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김좌진은 북간도 산림지역인왕청현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平)에 병영을 마련한 후 독립군 간부양성을 위해1920년 2월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설치했다.

사관연성소 교장은 김좌진이었으며 나중소(羅仲昭)ㆍ이장녕(李章寧)ㆍ이범석(李範錫)ㆍ김규식(金奎植) 등이 교관을 맡았다.

이들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김좌진은 1920년 3월부터 300여명의 생도들을 모집해 사관교육을 시켰다.

교육은 역사학ㆍ군사학ㆍ전술ㆍ체조ㆍ사격ㆍ승마 등 20여개 과목이었으며, 민족정신을 고양키 위해 역사교육이 강조되었다.

과정은 6개월 속성이었으나 엄격한 군율 아래 실전위주의 교육을 실시했다.

김좌진은 사관생도뿐만 아니라 일반병사 양성에도 주력했다.

병사모집은 김좌진 책임하에 징모국에서 담당했다. 병사모집은 만주뿐만 아니라 국내와 러시아에서도 이루어졌다.

모집된 병사들은 300~400여명 이었으며 속성으로 교육해 보병대로 편재했다.

독립군은 양성되었으나 무기가 문제였다. 양성된 독립군들이 사용할 무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다행이 제1차세계대전 중 블라디보스톡에 출병했던 체코군들이돌아가면서 자신들이 사용했던 무기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김좌진과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徐一)은 30여명의 호위 경비대로 무장한 200여명의 무기운반대를파견해 무기를 구입했다.

무기운반대는 무거운 무기들을 들고 산림을 헤치며 국경을 넘었으며 일본군과 중국 마적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무기를 운반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대한군정군은 총기 800정, 기관총 4정, 야포 2문, 수류탄 2,000여개로 완전한 전투력을 갖출 수 있었다.

김좌진은 1920년 9월 사관연성소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대한군정군을 1개 소대를 50명으로 조직하고, 2개소대를 1개 중대, 4개 중대를 1개 대대로 총 4개 대대로 편재한후 결전의 땅 청산리로 이동했다.
/이성우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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