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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의병의 날'이 있는 6월과 수당 이남규 선생

2020.06.15(월) 00:08:18 | 이영희 (이메일주소:dkfmqktlek@hanmail.net
               	dkfmqktlek@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월에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국민의 호국, 보훈의식을 함양하고 국민들 스스로 가슴에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마음을 갖자는 의미의 달이다. 6월 6일은 현충일이고,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도 6월이며, 제2연평해전의 정부기념식을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개최하는 것도 6월의 일이다. 그래서 6월 한 달을 추모의 기간(6월 1일~10일), 감사의 기간(6월 11일~20일), 화합과 단결의 기간(6월 21일~30일)으로 정해 그 의미를 기린다.
  
하지만 지난 6월 1일은 무슨 날인지 아시는 분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다. 해마다 6월 1일은 대한민국이 '의병'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 '의병의 날'이다. 의병의 날로 정한 6월1일은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홍의장군 곽재우가 경남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의병의 효시가 됐던 4월 22일 그날이다. 당시의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6월1일이 돼서 그게 의병의 날로 정해졌다.
 
의병은 말 그대로 관군이 아닌, 외국의 침략에 맞서 민중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저항 조직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징발 명령과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종군하여 전쟁에 참여하는 자위군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의병장이 있고, 반대로 이름 없이 쓰러져 간 수많은 의병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홍성의 홍주성 전투에서 일제와 맞서 격렬하게 싸운 청양군 민종식 의병장이 계시고, 민종식 의병장이 왜병에게 쫓길 때 집안에 숨겨 주었던 분, 바로 예산의 수당 이남규 선생도 계시다.
 
수당 이남규 선생이야말로 해마다 6월의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꼭 기억하고 되돌아 보며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하는 분이다.
 
이남규 선생 기념관
▲이남규 선생 기념관
 
기념관 내부 전경
▲기념관 내부 전경
 
'의병의 날'이 있는 6월과 수당 이남규 선생 1
▲방명록  
 
이남규 선생 흉상
▲이남규 선생 흉상
 
도
▲이남규 선생 연보
 
이남규 선생은 고종 때 과거시험에 합격해 주요 관직에서 재직하던 중 1894년 5월 일본공사 오도리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자 상소를 올려 일본의 무도함을 규탄할 것을 요구했던 분이다. 또 명성황후 시해의 통분함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서 있던 중 1906년 병오의병 당시 홍주에서 거의하였던 민종식 의병장이 일본군에 패하여 은신을 요구하자 숨겨 주었다. 그로 인해 의병과 관련 있다는 이유로 1907년 공주옥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이후 일제의 끈질긴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의병활동을 하시다가 온양(지금의 아산시)으로 끌려가게 됐다. 선생이 일제 헌병들에게 의해 끌려 가던 날, 선생의 큰 아들 이충구 선생과 노비였던 김응길, 가수복 두 사람이 함께 따라 나섰다. 아들은 아버지를 사지에 홀로 가시게 할수 없어서 그랬고, 노비 두명 역시 모시던 주인이 일제에 끌려가자 어떻게든 보호해 보겠다고 함께 따라 나선 것이다. 선생이 일제에 끌려가던 중 일행이 아산에 이르렀을 때 일제는 총칼을 휘둘렀고 4명 중 수당 선생과 아들 이충구, 그리고 노비 2명 중 김응길 선생이 그 자리서 피살당했다.
 
이남규 선생 등 가문의 훈장과 각종 유품 전시
▲이남규 선생 등 가문의 훈장과 각종 유품 전시
 
이남규 선생 훈장
▲이남규 선생 훈장
 
묵
▲선생의 각종 유품
 
선생의 교지.
▲선생의 교지
 
선생의 마지막 외침이었던
▲선생의 피살 직전 마지막 외침이었던 '우리 백만 의병이 내 머릿속에 있다' 했던 어록비가 아산에 있다

일제가 선생을 살해하는 장면을 상상해 만든 미니어처
▲일제가 선생을 살해하는 장면을 상상해 만든 미니어처
 
사가살 불가욕
▲'사가살 불가욕(士加殺 不可辱)'

수당 선생이 일제에 끌려가면서 저들에게 일갈했던 말 ‘사가살 불가욕(士加殺 不可辱)’ 즉, 선비는 차라리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는 고귀한 정신을 통렬하게 던져줬던 기개는 후세의 우리에게 너무나 큰 감명으로 남는다.
 
예산에 가면 수당 선생의 기념관과 생가가 있다.
 
수당 이남규 선생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아들 이충구 1991년 건국훈장, 손자 이승복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증손 이장원(해병 중위) 1953년 충무무공훈장으로로 이어지는 위대한 호국애족 가훈이다.
 
이중에 4대 이장원 중위는 6.25전쟁 중 중대를 이끌고 북한 지역에서 내무성 직속 대대와 교전해 적을 격멸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전 중 옆에서 터진 포탄 파편에 현장에서 전사했다. 인천 상륙작전과 원산 상륙작전을 앞두고 벌어진 북한 지역의 이 중요한 전투가 큰 역할을 하게 됐고, 그 덕분에 두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어서 1953년에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한 사람도 호국애족훈장을 받기 어려운데, 4대에 걸쳐 온 가족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고 알려진다. 이런 경우야말로 진정으로 노블레스오블리제 아닐까.
 
기념관을 나와서 우측으로 가면 1976년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이남규 생가가 있다.
 
기념관 우측의 생가
▲기념관 우측의 생가
 
생가 사랑채
▲생가 사랑채
 
본채 대문 기둥에 붙어있다.
▲본채 대문 기둥에는 전통한옥문화체험 우수 숙박시설 표장이 붙어 있다
 
'ㅁ'자형 본채
▲'ㅁ'자형 본채
 
본채 천정에 걸려있는 '염경헌'
▲본채 '염경헌'
 
생가 건물은 3동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목조건물이다. 남향집으로 'ㄷ'자형의 사랑채와 'U'자형의 안채가 있고, 모두 5량의 굴도리집 형태를 띠고 있다.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국난의 시대에 가족과 자신의 생애를 모두 버리고 분연히 일어난 의병과 애국자들. 우리 시대에 절절한 마음으로 감사해야 하고 고맙게 존경해야 하는 분들, 그분들은 우리에게 '애국애족'이라는 가장 소중한 유산을 남겨 주었다.
 
의병의 날이 있는 6월 호국보훈의 달에 다시금 존경하는 마음을 가다듬어 수당 이남규 선생과 그 가문을 우러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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