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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산해당에 잠든 충암의 뜻

내포칼럼-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2020.05.06(수) 00:30:12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ktx@korea.kr
               	ktx@korea.kr)

산해당에 잠든 충암의 뜻 1


조선 중기 문신·학자·문인화가
중종에 “폐비신씨 복위” 상소
권신들의 반발 속 빛났던 기개
 
‘사림 영수’ 조광조와 손잡고
개혁정치·경연·향약보급에 힘써
‘조정·백성에 헌신했던 소나무’

 
대전시 동구 회남로 117에는 고풍 어린 산해당(山海堂)이 있다. 조선 중종때 조광조와 함께이상 정치에 힘쓴충암 김정의 넋을위로하는 사당이다(본래는 대덕군 동면 내탑리 소재). 봄볕이 유난히 아름다운 산해당에서, 나는 잠시 그의높은 뜻을 추억했다.

김정은 문과에 장원급제한 수재였다. 그는 화려한 벼슬을 마다하고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시골 원님을 자청했다.

중종 10년(1515년) 김정은 순창군수로 재임 중이었는데, 천재지변이 많아 중종은 난국을 돌파할 의견을 널리 물었다. 그는 담양부사 박상과 함께 의미심장한 상소문을 지어 바쳤다.

앞서 정국공신 박원종 등은 중종에게단경왕후(신씨)와이혼하기를 강요했다. 외척을 미워해 죄 없는 왕후를 몰아낸 것이었다. 김정과 박상은 공신들의 죄를 성토하고 중종에게 단경왕후와의 재결합을 건의했다.

이 상소문으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아직 건재했던 공신들은 김정과 박상의 벼슬을빼앗고 시골로 유배 보냈다. 그러나 김정과 박상의 기개를 칭찬하는 선비들도 더러 있었다.

그 이듬해 청년 조광조가 사림의영수로서 조정에 나서자상황이 급변했다. 김정은 귀양에서 풀려속리산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조광조가 편지를 보내 속히 조정에 복귀하기를간청했다.

중종 12년 가을, 김정은 홍문관 부제학이 됐고, 2년 뒤에는 형조 판서로서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다. 그는조광조 및 김식과함께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김정의 학식이 탁월해왕과 대신들이 합석한 경연을 빛냈다. 그는 향약을 널리 보급하는 데도 주력했다.

그러나 개혁정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심정과 남곤이 홍경주와 흉모를 꾸며 의심 많은 중종을 부추겼다. 중종 14년(1519) 11월 15일, 기묘사화가 일어나 김정은 금산으로 유배됐다.

그는 유배지에서 모친이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금산군수의 양해를 얻어 모친을 뵙고 되돌아왔다. 그런데 그 일을 왜곡해 마치 김정이 유배지를 멋대로 이탈했다가 잡혀 온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김정은 다시 곤욕을 치른 다음 제주도로 배소(配所)를 옮겼다. 땅 끝 해남 바닷가에 도착한 그는길섶에 선 소나무를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기묘록 보유>). 
    
선비들이 이시를 외우며 눈물을 흘렸다. 백성을 구하려다가 죄를 입은 김정의 처지가 가련했기 때문이다.

중종 16년, 조광조의 동료들에 대한 탄압이 다시 일어나, “자진(自盡)하라”는 왕명이 김정에게도 내려졌다. 그는 고향의 형제에게 노모를 부탁하는 서신을 쓴 다음 영면했다(향년 36세).

기록에 의하면 김정은 몸가짐이 발랐고 말을 아꼈으며, 청탁을 모두 거절했다. 또 자신의 녹봉을 가난한 친척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후세는 그의 관작을 회복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로 업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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