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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

우금티 패퇴군의 퇴로…서천·한산읍성 혈전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⑮서천의 동학농민혁명

2019.11.26(화) 23:22:08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ktx@korea.kr
               	ktx@korea.kr)


서천은 홍산, 보령, 남포와 함께 남부 내포지방의 대표적인 고을이다. 지금의 서천군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서천, 한산, 비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천 땅에 동학이 처음 전래된 것은 해월 최시형이 공주 가섭암에서 포덕에 전념하던 1880년대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해안에 연해 있어 조운이 발달한 서천지방은 물산이 풍부하여 지방관의 수탈이 일상화되었던 지역이다. 이런 까닭에 동학이 전래되자 조직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서천의 추용성, 한산의 김약선, 비인의 김우경이 서천지방을 대표하는 접주가 되었다.

지금도 서천지방은 전북과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서천은 전라도지방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소식을 가장 먼저 들었고,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

충청감사 이헌영은 “7월 7일 동학배들이 서천·청양 등의 읍에서 소란을 피운” 사실과 “7월 17일 동학배들이 연기·한산 등의 지역에서 소란을 피운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서천군수 김인수도 “7월 9일 오시 무렵에 부안의 동학인이라고 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 57명이 각각 총과 창을 지니고 한산에서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총을 쏘면서 읍에 들어와 각 관청 건물에 머무르며 술과 음식을 토색하여, 수성포수가 지닌 총 6자루, 화약 3근, 철환 100개, 창 2자루, 시골 당나귀 2필, 말 1필 등을 빼앗아갔다”라고 충청감영에 보고하였다.

서천지방 동학농민군의 기포는 1894년 10월부터였지만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1월이 지나서였다. 우금티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서천지방 동학농민군이 크게 기포한 것이다. 이렇게 서천지방 동학농민군이 기포하자 11월 19일 전라도 함열 웅포에 주둔하고 있던 금구 접주 박여장이 신성포 나루를 건너와 한산의 접주 김태운, 전한규와 합세하여 한산읍성을 점령하고 관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관청 건물과 마을이 불타 버렸다.

내포의 다른 지방과 달리 서천지방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11월이 되어서야 활발했던 이유는 공주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의 후퇴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천에서 경군의 배후를 위협함으로써 추격을 저지하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예상대로 경군은 서산군수 성하영에게 2개 소대의 지원군을 주었고, 장위영 병사 및 아카마츠가 이끄는 일본군을 추가로 파견하였다.

경군과 일본군이 서천에 진입하면서 한산읍성, 서천읍성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의 전력으로는 정규군에 맞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한산, 서천 전투에서 연달아 패한 동학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태반은 강을 건너 임피로 도주하였다. 하지만 미처 도주하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경군이 한산에 진을 치고 주둔하는 동안 유회군과 경군에 의해 사로잡혀 죽었다. 서천·한산 일대는 동학농민군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사)당진시동학농민혁명승전목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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