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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 힘든 시기 머물던 곳… 고암의 애틋한 사연 가득

홍성이 낳은 세계적 화가 고암 이응노

2014.07.16(수) 22:11:34 | 홍주신문 (이메일주소:rlarudal4767@daum.net
               	rlarudal4767@daum.net)

수덕여관, 힘든 시기 머물던 곳… 고암의 애틋한 사연 가득 1

충남 예산군은 고암 이응노를 거론할 때 홍성, 대전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홍성과는 지난 2000년대 후반 고암의 출생지를 놓고 법정공방을 벌이기도 했으나 고암이 6·25 전쟁 당시 피난을 내려와 있던 곳이 바로 예산이었으며 대전형무소 출소 이후에도 가족과 함께 머물던 수덕여관이 예산 수덕사에 위치해 있다.

고암의 첫 번째 부인인 박귀희 여사는 고암이 프랑스로 떠난 이후 50여년간 수덕여관을 지켰고 이후 수덕사는 수덕여관을 보존하자는 여론을 수렴해 복원, 바로 옆에 고암 이응노 화백의 작품과 예술세계를 재조명키 위한 ‘선 미술관’을 개관했다.

이응노생가기념관이 있는 홍성과 멀지 않은 충남 예산의 수덕여관. 수덕여관은 고암이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몸을 추스렸던 장소이다. 또 고암의 첫 부인인 박귀희 여사가 운영하던 여관이기도 하다.

1969년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뒤에도 이 곳에 잠시 머물며 문자추상 암각화를 남겼다. 고암이 프랑스로 간 뒤에는 부인 박귀희 여사가 홀로 지키며 식당과 여관 등으로 사용해 왔으나 2002년 박 여사가 사망한 뒤 방치됐다. 이후 2006년 1월 수덕사가 매입해 옛 모습을 되찾게 됐다. 수덕여관은 ‘ㄷ’자형 초가로 방 7개, 장지문, 툇마루, 부엌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이응노는 대전형무소에서 출소 이후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수덕사 암각화’ 등 바위에 추상문자를 새겨 넣는 작업에 열중했고 그 작품은 현재 수덕여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옥고를 치른 후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스릴 때 끓어오르는 표현의 의지를 이렇게 드러냈던 것이다.

이응노는 회고록에서 “수덕여관에서 참 오랜만에 한가하게 지냈지. 산책하고 그림 그리고 산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우물 근처 너럭바위에 앉아 넋 놓고 계곡 물소리를 듣는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바위에 그림을 그리는 거 말이야. 나는 곧 지필묵을 갖추고 바위 옆면을 따라가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라고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수덕여관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간다. 예술가 나혜석을 필두로 많은 문사들이 여관에 머물며 몸과 마음을 추스렸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 때 이응노가 선배화가인 그녀를 찾아왔다. 나혜석은 파리를 절대적으로 그리워했다. 예술의 모든 것이 숨 쉬는 파리에 대한 꿈은 이응노에게 전해졌다. 이응노는 1944년에 수덕여관을 사들여 부인 박 여사에게 운영을 맡기고 1956년에 파리로 떠났다.

옥고를 치른 이응노가 잠시 쉬어가긴 했지만 50년 동안 여관을 일구며 여관에서 살아온 사람은 선생의 부인인 박귀희 여사다. 여사는 2001년 돌아가실 때까지 50년간 여관을 운영했다. 박 여사가 세상을 달리 한 이후 잡풀이 자라고 종이문이 뜯겨나가 폐허로 방치되자 예산군과 수덕사는 2007년에 여관을 복원했다.

고암이 거쳐한 방은 문패가 붙어 있으나 현재는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8개의 방을 터서 3개의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마당 중간에 솟아있는 굴뚝은 방이 많은 여관의 구들을 모두 데우기 위한 굴뚝이다. 한때 여관이 폐허가 되었을 때 이 굴뚝을 타고 담쟁이가 기둥처럼 자라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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