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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시대

도청 내어준 대가로 공주 금강대교 건설

충남도청 이전(9·끝) 공주의 변화

2012.12.27(목) 17:33:42 | (이메일주소:
               	)

2년의 난공사 서울 가는 유일한 다리
 
2012년 12월 18일 오전 9시 대전시 중구 선화동 소재 충남도청사 앞마당은 이사 차량의 환송행사로 분주했다. 이날 권희태 정무부지사는 안희정 도지사에게 출발에 앞서 인사를 했고 안지사는 "많이 아쉽고 섭섭하다. 지난 80년동안 충남도청과 함께 해주신 대전 시민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아쉬움을 표하는 인사말을 꺼냈다. 아울러 내포시대의 서막을 여는 충남도의 희망찬 도전과 다짐도 강조했다. 이어 정무부지사실과 소방안전본부의 이삿짐을 실은 차량들이 일제히 시동을 걸고 도지사와 직원들의 환송을 뒤로한 채 정문을 나섰다. 아쉬움과 새희망의 내포신도시 이전은 이렇게 시작돼 오는 28일까지 계속된다.
 

도청 내어준 대가로 공주 금강대교 건설 1

▲ 2012년 12월 18일 정무부지사실 이삿짐을 실은 차량이 대전의 충남도청사를 떠나고 있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공주
 
80년전, 충남도청의 이전으로 대전이 승승장구하는 반면 공주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1931년 12월 12일 대전에서는 청사 상량식이 거행되고 이듬해 5월 30일 준공되어 도청의 이전이 목전에 다다랐다. 공주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집값과 땅값이 폭락하고 당장 공주를 떠나는 사람도 생겼다. 6월 17일 총독부는 부령(府令) 제48호로 충남도청의 대전이전을 정식으로 공포했다. 청사 준공 4개월 뒤인 9월 3일부터는 공주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청 이전작업을 시작했고 10월 1일 이전을 마무리했다.
이제 공주의 관심은 도청 이전에 따른 보상이 어떻게 이뤄지느냐에 있었다. 1932년 7월 10일 공주읍사무소 앞뜰에서 개최된 공주시민회 총회에서 시민회 대표들은 ‘도 및 총독부 예산으로 처리해야 할 13가지’와 ‘국비로 시설해 주어야 할 7가지’, ‘당장 해결해야 할 보상요구 3가지’를 결의했다.
 
금강대교 건설 등 23가지 요구
 
지수걸 교수에 따르면 ‘도 및 총독부 예산으로 처리해야 할 13가지’는 ▲5년제 농업학교 설치 ▲공주-신상 온천간 도로 개수 ▲공주-예산간 도로 중 웅진 도강장 폐지 및 연미산 돌아 신관리로 연결하는 도로 개설 ▲공주-예산 간 도로 중 동천진에 교량 가설 ▲공주시장을 읍 경영으로 해줄 것 ▲산성공원 내 도로 개설 ▲공주신사 직통 참배도로 개설 ▲백제박물관 지방비로 설치 ▲읍채 8만원, 학교조합비 1000원 국비 부담 ▲시내 하수구 및 교량 신축 ▲공주-조치원간 승합차 경영 철도 국영 전환 ▲우편국 옆 도로 신설 ▲금강대교 건설 촉진이었다.
 

도청 내어준 대가로 공주 금강대교 건설 2

▲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사를 금강변에 복원해 놓았다. 정문에 해당하는 포정사의 모습.


‘국비로 시설해 줄 것’의 요구는 ▲철도부설 ▲의학전문학교 신설 ▲고등농림학교 또는 고등상업학교 설치 ▲관립 사범학교 설치 ▲공병대 주둔 ▲전매지국 설치 ▲국립공원 설치 등이다. ‘당장 해결해 줄 것’은 ▲중선철도(영월-조치원-공주-장항)의 건설 ▲관립 사범학교 설치 ▲궁민구제자금의 융통 등이었다.
이는 지역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의 모든 요구였는데, 총독부에 의해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진 요구사항은 ▲금강교 가설 ▲농업학교 개교 ▲사범학교 설립 ▲재판소·잠종시험소 등 각종 부속기관의 대전이전 보류 등에 불과했다.
 
뱃사공들, 금강대교 가설 반대
 
이중 가장 큰 사업은 금강대교 건설로 10만원의 예산이 책정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공주읍민들은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교통이 불편해 도청을 옮긴다고 해놓고 금강대교를 건설한다는 데에 대한 반발이었다. 1932년 1월 10일 금강대교 기공식이 열렸다. 그런데 이날 기공식에서 뜻하지 않은 시위가 벌어졌다고 한다. 변평섭의 저서에 따르면, 나룻배로 사람들을 나르던 뱃사공들이 오랜 삶의 터전을 잃게 되자 다리 건설 반대시위를 벌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오카사키 지사는 즉석에서 뱃사공들에 대한 생계대책을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금일봉을 주어 회유했다고 한다. 사태는 일단 진정되었지만 며칠 후 늙은 뱃사공 한명이 “평생 지켜온 나룻배를 잃을 수 없다”며 결국 자신의 나룻배에서 음독자살을 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작된 공사였는지 몰라도 공사도중 일부가 물에 빠져 숨지기도 했고 그해 초가을 많은 비가 내려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뱃사공의 넋이 구천을 맴돌며 공사를 방해한다”고 하기도 하고 “곰나루의 곰이 노했다”고 하기도 했으며 “도청을 빼앗아가고 시작한 공사인데, 잘 될 턱이 있겠느냐”며 빈정대기도 했다.

김수진 전 부지사는 “공주 사람들은 금강대교를 한(恨)의 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도청을 내어주고 얻은 다리이기 때문에 공주사람들에겐 한이 맺힐 수밖에 없는 다리라는 것이다. 김 전부지사에 따르면 원래 이 다리는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남양군도의 작전 교량으로 쓸 예정이었다고 한다.
 

도청 내어준 대가로 공주 금강대교 건설 3

▲ 1933년 11월 금강대교가 준공되어 개통식을 갖고 있다.

 
53년간 금강 건너는 유일한 교통로
 
어쨌든 2년여의 공사를 거쳐 1933년 11월 금강대교는 완공을 보아 성대한 개통식을 가졌다. 비로소 공주는 이 다리를 건너 천안으로 통할 수 있었고 53년간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 되었다. 금강대교가 좁아 공주대교를 다시 건설한 1986년까지 금강대교는 공주의 명물이자 금강을 건너는 유일한 교통로였다.

그러나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도청마저 빼앗겨버린 당시 공주읍민들의 마음의 상처는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었다. 따라서 도청 이전이 거론되던 시기에 공주에서는 이를 유치하려는 운동을 ‘환청운동’이라 했다. 도청을 원위치 시킨다는 의미였다.

이제 2012년 12월 28일 행정부지사실, 홍보협력관실, 행정부지사실이 이전하는 것을 끝으로 대전에서 내포신청사로의 도청이전이 완전히 마무리된다. 80년하고도 1개월 28일만에 충남도청의 대전시대가 마감되고 새로운 내포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도청 내어준 대가로 공주 금강대교 건설 4

▲ 53년간 금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로 역할을 해왔던 금강대교의 모습.

 

 

<참고자료>
김나아 “일제하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과 지역사회의 동향” 충남대 대학원 석사논문. 2011
김정동 "근대도시, 대전의 시작-대전역에서 충남도청까지" 대한건축학회 대전·충남지회 학술대회 발표자료. 2010년
변평섭 "실록 충남반세기" 1983년
이상희·김정동 “근대건축 보존을 위한 도시공간의 역사성 연구”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대회 발표문. 2012
정내수 “대전의 도시발전” <대전 100년사> 2002년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있다” 2012
조선공로자명감간행회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 1935년
지수걸 “도청의 설립과 이전” <충청남도지> 2010
지수걸 “일제하 공주지역 유지집단의 도청이전 반대운동” 1996년
충청남도 “도전사료소장품목록”
충청남도역사문화원 “충청남도역사박물관” 2006년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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