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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시대

집집마다 축하등불 거리마다 인산인해

충남도청 이전(6) 청사의 신축과정과 대전의 분위기

2012.11.12(월) 15:02:36 | (이메일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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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이전이 확정되자 충남도는 도청부지 매입을 추진했다. 낮은 구릉지대였던 이 일대의 땅 1만평에 대해 소유주인 김갑순이 무상 기증하겠다는 애초의 약속을 번복하고 대가를 요구했다.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다급해진 충남도는 대전군수 등을 동원해 김갑순을 설득했다. 결국 약속대로 1만 1596평을 무상으로 기증하기로 발표한 것이 1931년 5월초의 일이었다.

김갑순 부지 무상기증 번복 해프닝끝 신청사 기공
 
김나아의 논문에 따르면 대략 1만평중 6000평은 도청사를 짓고 나머지 4000평 중 3000평은 도지사, 참여관, 내무부장, 경찰부장 등의 관사를 짓고 나머지 1000평은 각 과장, 주임, 기타 사택으로 짓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도청 건축에 대한 입찰은 그 해 6월 9일에 시행됐는데, 낙찰의 행운은 대전의 자산가이자 토건업자인 스즈키 겐지로(須須木權次郞)에게 돌아갔다.
 
그는 대전으로의 도청이전을 로비했던 대전기성회 간사장으로 핵심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특히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총독의 독직사건 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16만 7400원을 써 넣어 낙찰됐는데, 공주대 지수걸 교수에 의하면 이 액수는 당시 공사비 예정가액의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신축공사 기공은 6월 15일에 있었었는데, 건물은 지상 2층에 지하 1층의 1개동이며 연건평 1451평의 규모였다. 설계는 조선총독부 영선계(營繕係)에서 했다. 8월 24일 조선총독부는 도청이전 문제를 잡음 없이 마무리하기 위해 오카사키 데츠로(罔崎哲郞)를 충남도지사로 임명했다. 오카사키 지사가 억센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이미 전술한 바와 같다.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에 따르면 그는 “배짱이 두둑하므로 도청문제 뒷마무리를 하기에 적임자이다. 개방적이어서 공주의 유력자와 흉금을 터놓고 교제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방민들의 뱃속에 들어앉아서 해결책을 강구했다”고 평가받았다.
 

도청 상량식 행사 장면(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도청 상량식 행사 장면(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오카사키 지사 부임후 공사 순조…도로확장 등 서둘러 진행

어쨌든 기공식이후 특별한 문제없이 공사는 순조롭게 초고속으로 진행됐다. 도청사의 신축과 함께 대전역과 도청사간의 도로확장 공사가 계획되었고 그해 말인 12월 12일 도청 상량식이 거행되었다. 상량식은 일본 관습으로 한번 치르고 다시 조선인 인부들을 위해 조선 관습대로 치렀다고 한다.

변평섭의 저서 ‘실록 충남반세기’에 따르면 감사골 터주신에게 고하기 위해 일곱 마리 돼지를 잡고, 일곱 개의 시루떡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공사를 맡은 스즈키 회사에서는 조선인 인부들을 위해 특별히 술과 음식을 차려 잔치를 벌였다고 적고 있다.
 
해를 넘겨 도청의 신축으로 활기를 띤 대전에서는 대전역과 도청 간 신작로 확장공사가 서둘러 진행됐으며 1932년 7월 28일 대전의 공직자 30명이 대전읍사무소에 모여 이청식(移廳式)을 준비하고 협찬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9월 10일 드디어 청사의 준공을 보게 되었다.

공주·대전·내포의 역사담길 대형 철제금고의 사연
 
청사가 준공되고 10월 1일 이청식이 예고되어 대전역과 도청간 도로공사, 상수도 공사가 서둘러 진행됐다. 9월 중순부터 도청 이전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도청이 보유하고 있던 대형 철제금고의 이전작업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해온 대형 철제 금고. 현재 도청 총무과에서 보관하고 있다.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해온 대형 철제 금고. 현재 도청 총무과에서 보관하고 있다.
 

금고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을 증명하는 상표 문양

▲금고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을 증명하는 상표 문양


변평섭의 저서에 따르면 금고의 무게가 엄청나 기중기도 없는 데다 당시의 소형트럭으로 옮기기엔 벅차서 공주군청에 두고 가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금고가 충남도의 명물이었고 특별히 일본에서 주문 제작한 것이라 어렵더라도 옮기기로 했다는 것. 트럭 1대엔 금고를 싣고 다른 트럭 1대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인부들을 태우고 출발했는데, 모퉁이를 돌 때마다 혹은 도로상태가 좋지 않은 곳을 갈 때에 차량이 뒤뚱거리는 바람에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고 한다. 결국 금고는 무사히 대전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오카사키 지사는 트럭 운전기사에게 상여금으로 20원을 주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금고 앞면 문양을 보면 ‘다케우치(竹內) 제조(製造)’라 새겨져 있고 주소는 도쿄(東京) 바쿠로쵸로 적혀있다. 제작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92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90년 가까운 풍상을 겪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이 금고는 도청 총무과에 보관되어 있는데, 내포 신도청으로 이사할 때 함께 갈 예정이어서 공주와 대전 그리고 내포 청사 모두를 겪은 도청 유일의 물품이 될 것이다.
 

대전 제1보통학교에서 열린 충남도청 이전축하 체육대회 모습(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대전 제1보통학교에서 열린 충남도청 이전축하 체육대회 모습(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10월 1일 개청식 공주반발우려 조촐하게 치러

이전이 완료되자 대전에서는 개청식과 이청식을 따로 진행했다. 공주의 반발을 우려해 10월 1일 개청식을 조촐하게 치른 뒤 10월 3일부터 사무를 시작했다. 이청식은 10월 14일 오전 10시 신도청사에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 조선총독을 비롯해 500여명의 내빈이 참여한 가운데 거행됐다. 오카사키 지사의 식사(式辭)를 시작으로 총독의 축사, 경북지사의 축사 순으로 진행했다. 대전역에서 도청까지 학생과 시민 7000여명이 모여 악대와 함께 축하행진을 벌여 오후 1시에 이청식이 끝났다. 오후에는 대전읍에서 도청이전 축하연이 열렸는데, 1000여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뤘다.

특히 야간에는 집집마다 수만개의 축하 등불을 내걸고 5000여명의 군중들이 가장행렬과 촌극, 사물놀이, 제등행렬을 벌여 거리마다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 대전 신미구락부(辛未俱樂部)가 전도명창대회(全道名唱大會)를 열었고 10월 23일에는 대전체육회 주최 대전시민육상대회가 제1보통학교(구 원동초등학교)에서 열렸다. 향토사학자 김영한씨는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도청이전한 날과 이전식이 있었던 날 대전 시내 음식점이 무료였고 극장도 도청이전 기념으로 한동안 무료 상영했다”고 말했다.
 
일제의 한반도 식민통치 지배전략으로 단행된 충남도청의 이전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전을 한반도 중핵도시로 키우는 계기가 됐다. 충남의 수부도시(首部都市)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온 대전은 80년 전 공주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그 지위를 내포로 넘겨주는 시점을 맞이했다. 그러나 도시의 운명을 걸고 도청의 이전운동과 이전저지운동을 벌였던 그 때와는 분위기가 자못 다르다. 도청을 내어주는 대전도, 도청이 건설되는 내포신도시도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그 향배가 궁금하다.
<우희창 미디어센터장>
 

<참고자료>
김나아 '일제하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과 지역사회의 동향' 충남대 대학원 석사논문. 2011년
변평섭 '실록 충남반세기' 1983년
정내수 '대전의 도시발전' <대전 100년사> 2002년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있다' 2012년
조선공로자명감간행회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 1935년
지수걸 '도청의 설립과 이전' <충청남도지> 2010년
지수걸 '일제하 공주지역 유지집단의 도청이전 반대운동' 1996년
충청남도 '도정사료소장품목록' 1997년
충청남도역사문화원 '충청남도역사박물관'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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