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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진정한 풍류를 즐긴 선비

이향배 교수의 충남 유교문화의 향기 (9) 맹사성 … 당대 음악에 정통한 전문가

2011.04.15(금) | 관리자 (이메일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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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의 작자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소 타고 출입하며 피리를 잘 연주한 정승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온양(아산)에서 서울을 왕래할 때 소 타고 다녔지만 사람들이 그가 정승인지 잘 몰랐다. 이로 인해 많은 고사가 생겨났는데 ‘공당문답(公堂問答)’이 그중 하나이다.
맹사성이 한양에 올라가던 도중 용인에서 비를 피하느라 여관으로 갔다. 그곳에는 과거보러 가는 영남 선비가 먼저 와 있었는데 맹사성을 보고 불러서 자리를 함께 했다. 바둑도 두고 담소를 나누다가 ‘공’과 ‘당’을 끝말에 붙여 말하기로 했다. ‘어디 가는공?’ ‘서울 간당.’ ‘무슨 일로 가는공?’ ‘과거 보러 간당.’ ‘벼슬길인데 내가 자리 하나 마련해 주면 어떤공?’ ‘실없는 소리는 하지도 말란당.’
며칠 후에 그를 과거시험장에서 만났다. ‘과거는 잘 보았는공?’ ‘죽을 죄이어당.’했다는 것이다. 맹사성은 그를 버릇없다 하지 않고 추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해 주었다.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지도 않고 너그럽게 대해 준 그의 도량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은 가정과 조정에서 대체(大體)를 잘 지켰다.
조선 중기 문신 기준(奇遵)의 무인기문(戊寅記聞)에도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정승 맹사성은 살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제나 녹미(祿米·봉급으로 지급되는 쌀)만 먹고 생활했다. 어느 날 부인이 햅쌀로 밥을 지어 올렸다. 맹사성이 “햅쌀을 어디서 구했소”하고 묻으니, 부인이 “녹미가 오래 묵어서 먹을 수 없기에 이웃집에서 빌려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미 녹봉으로 쌀을 받았으면 그 쌀을 먹어야 당연하지, 어찌 이웃집에서 쌀을 빌려 왔단 말이오.”라고 훈계했다.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거의 완성했을 때 세종이 아버지 태종에 대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보고 싶어 했다.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은 임금이 실록을 보는 선례를 남기면 후세 임금이 본받게 되고, 사관도 의심하고 두려워 자신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세종은 어쩌지도 못하고 그의 말을 따랐다.
맹사성은 공무가 아니면 손님을 만나지 않았다. 여름에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고 겨울에는 방 안 부들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곁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다. 집안에서 항상 그는 피리를 잡고 날마다 서너 곡조를 연주했다. 그래서 공무로 맹사성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마을 입구에 도착하면 피리 소리를 듣고서 그가 집에 있는지를 알았다고 한다.
사실 맹사성은 당대에 보기 드문 음악을 아는 전문가였다. 자신이 손수 악기를 만들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11년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그가 충주목사로 임명되자 예조(禮曹)는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도록 건의했다. 1412년 풍해(황해)도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로 임명되었을 때도 영의정 하륜(河崙)이 우리나라의 악보(樂譜)가 훼손되었는데 악보에 밝은 맹사성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이처럼 그는 주변으로부터 당대에 음악에 정통한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세종이 음악을 정비할 때 맹사성의 공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가 살던 고택(아산맹씨행단)이 온양에 고즈넉하게 남아 있다.

이향배/충남대 한문학과 교수

<사진>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 있는 아산맹씨행단(牙山孟氏杏壇·사적 제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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