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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정절로 광산 김씨를 명문가로 만들다

이향배 교수의 충남 유교문화의 향기 (7) 양천 허씨

2011.03.15(화) | 관리자 (이메일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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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명문가(名門家) 중에는 여인으로 인해 가문이 부흥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연산 광산김씨(光山金氏) 가문의 양천허씨(陽川許氏, ?~1455) 부인이다. 부자지간인 사계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 김집(金集)을 배출한 광산김씨 가문이 번성한 것은 그녀의 정절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김장생의 7대조 할머니이다.

허씨 부인은 대사헌 허응(許應)의 딸이다. 본가는 개성에 있었다. 그녀는 충청도 관찰사 김약채(金若采)의 아들인 김문(金問)에게 어린 나이로 시집갔다. 김문은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지만 허씨 부인의 나이 17세(조선 태조 2년) 때 죽고 말았다. 부인은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상을 마쳤다. 부인에게는 유복자가 있었지만 청상과부로 평생을 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나이였다.

당시 고려에서는 여인이 개가(改嫁)할 수 있었다. 친정 부모는 딸을 다시 시집보내려고 몰래 다른 사람과 혼약을 했다. 이를 알고 난 허씨 부인은 어린 아이를 업고 몰래 친정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허씨 부인이 친정을 떠나 연산의 시댁을 향해 600리 머나먼 길을 가는데 호랑이가 앞에서 인도해 주었다. 시댁에 이르는 고개에 도착하자 호랑이가 홀연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 고개를 범넘이재로 부른다고 한다.

허씨 부인이 갖은 고생을 하며 시댁에 겨우 도착했으나 시아버지는 며느리로 받아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허씨 부인은 시댁 근처에 있는 산기슭에 움막을 짓고 기거했다. 매일 시댁에 가서 꿇어앉고 며느리로 받아 달라고 요청했다. 어느 날 눈이 밤새 내렸는데 허씨 부인이 앉은 자리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시댁은 하늘이 열녀를 보호하는 뜻으로 알고 마침내 다시 며느리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세종이 즉위하여 곧바로 효자·절부(節婦)·의부(義夫)·순손(順孫)이 있는 곳을 찾아 실적(實迹)으로 보고하도록 했다. 허씨 부인의 정절이 조정에 보고되자 세종은 삼강행실도에 수록하게 했다. 1455년 허씨 부인이 79세(세조 1년)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세조는 마을에 정려(旌閭)를 세우고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시호를 내려 세상의 모범으로 삼았다. 정려는 효자나 열녀의 집 앞에 나라에서 세운 붉은 문을 말한다.

허씨 부인은 집안 살림을 잘 꾸리며 아들 철산(鐵山·사헌부감찰)을 훌륭히 키웠다. 그는 국광(國光·좌의정), 겸광(謙光·우참찬) 등 4형제를 낳았다. 김국광의 5세손이 바로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이다. 그 후 김집, 창주 김익희, 서필 김만중 등 훌륭한 자손들이 많이 배출되어 광산김씨의 중흥을 이루었다. 연산의 광산김씨가 명문가로 성장한 데에는 허씨 부인의 정절에서부터 시작함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녀가 당시 풍속에 따라 개가했다면 조선조 광산김씨 가문의 번성은 찾아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로 볼 때 한 집안에서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흔히 한 집안의 흥망이 남자에게 달려 있는 줄로 알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조선 사회의 명문가도 훌륭한 부인에 의해 이룩된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현대를 살아가는 남자들이여! 착각하지 말고 부인과 여성을 존중한다면 가문의 영광이 펼쳐지리라. /충남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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