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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 인물

청백리/학자

[이색]([李穡][목은(牧隱)]) [1328~1396]
이색
생 애 : 1328년 5월 신미일 영해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두살 때 선조들의 고향인 한산으로 돌아온다. 어려서부터 총명과 지혜가 남달리 뛰어나 8세에 숭정산 독서당에 입문, 학문을 시작한 후 여러 이름난 산사에 다니며 학문을 탐구하였다. 1382년 14세의 나이에 진사 성균시에 수석으로 급제하고 16세의 나이에 별장(정7품)의 벼슬을 받게 된다. 19세의 나이에 장가를 들려하자 당시 최고 명문 집안에서 서로 사위를 삼고자 하였는데 결국 당대 제일 명문 집안 중의 하나인 안동 권씨에게 장가든다. 26세때 고려 문과에 을과 1인으로 장원급제하고 다음해 3월에는 원나라에 들어가 정동행성 향시에 장원급제, 황제가 친림하는 전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한문의 본고장인 중국천하를 또 한 번 놀라게 하였다. 이 후 원과 고려에서 문한을 담당하는 온갖 청요의 직책을 두루 거치다가 결국 공의 나이 44세 되실 때 정당문학의 재상반열에 오르고 우왕 8년 55세에 판삼사사(종1품)가 되며 58세에 검교 문하시중이 되었다. 이 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와서 우왕을 폐하고 신왕을 옹립하고자 할 때 우왕의 세자인 창왕을 세우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 조민수등 과 함께 창왕을 옹립하였다. 61세에 최고의 벼슬인 문하시중에 오르게 되지만 얼마 후 이성계의 뜻을 따르지 않고 고려에 충성을 다하며 절의를 꺾지 않자 역모로 몰아 귀양을 가게 된다.
업 적 : 이색 선생은 학자와 정치가, 교육자이며 왕조교체기에 끝까지 고려에 대해 불사이군하는 충절을 지킨 충신이었다. 실천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리학의 기초를 마련하고 불교계의 폐단을 지적, 비판함으로써 불교사회에서 성리학시대를 여는데 이바지하였다. 문하에 권근(權近) ㆍ김종직(金宗直) ㆍ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한 교육가로서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윤증]([尹拯][명재(明齋) ㆍ유봉(酉峯)]) [1629~1714]
윤증
생 애 : 1624년(인조 20) 윤증의 14세 때 아버지 선거가 유계(兪棨)와 함께 금산에 살면서 도의를 강론했는데, 그때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9세에 권시의 딸과 혼인하고, 권시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29 세에 송시열에게 가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4년(현종 5) 36세에 내 시교관에 천거되고 이로부터 공조랑, 사헌부지평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호조참의 대사헌, 우 참찬, 좌찬성, 우의정,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41세(1699년)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주자가례에 의해 거상을 극진히 하면서도 거상중에 강학하기도 하였다. 학질로 84세에 생애를 마치게 된다.
업 적 :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당쟁의 한축이었으며 재야의 막후실력자 소론의 영수였으며 윤증은 왕의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우의정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역사상 단 한 명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는 출사하지도 않은 채 재야에서 일정한 세력을 등에 업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박문수]([朴文秀][기은(耆隱)]) [1691~1756]
박문수
생 애 : 1691년(숙종 17) 박항한의 아들로 태어났다. 1723년(경종 3)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당파 싸움으로 벼슬에서 쫓겨났다. 1727년 다시 벼슬길에 올라 영남 지방의 암행어사가 되었는데 암행어사의 임무를 슬기롭게, 훌륭히 수행하였 다. 1728년 당시 정치에 불만이 많았던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박문수는 반란을 진압하였고, 그 공으로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730년에는 다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가 굶주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박문수는 진주 부사로 있던 1734년에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 참판이 되었다. 이어 도승지, 평조 판서를 지냈으며, 1738년 사신으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41년에는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경상도 지역의 곡식1만 섬을 실어와 나눠 주었다. 이듬해 병조판서,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벼슬이 낮아졌다. 그 뒤 다시 어영대장을 거쳐 호조 판서가 되었는데, 백성들의 부역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하여 충주 목사로 쫓겨갔다. 박문수는 1752년 내의원 제조로 있을 때 왕세손이 죽자, 그 책임을 물어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 풀려 나와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영조 6년에는 참판이 되어 왕을 가까이 모신 박문수는, 아는게 많고 또 성격이 곧아서 바른말을 잘하였다.
업 적 : 이인좌의 난을 해결하는데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박문수는 암행어사로 활약하면서 온 나라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보고 가난한 백성들의 구제에 힘썼으며,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군정과 세정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 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 한강하류지역의 강화도와 통진(지금의 김포군) 경비에 심혈을 기울였고, 호조판서가 되면서 탁지정례를 만들어 많은 예산을 절감하여 균역법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맹사성]([孟思誠][고불(古佛) ㆍ동포(東浦)])[1360~1438]
맹사성
생 애 : 고려 공민왕 9년인 1360년 7월 17일에 송도(지금의 개성)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맹사성은 최영장군과 한 마을에 살았는데 나중 최영장군의 손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고려 말 대학자이자 교육 사상가인 권근이 맹사성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가르치기를 원해서 그로부터 글을 배웠다. 어머니는 맹사성이 열살 때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7일 동안 물 한 모금조차 먹지 않았으며,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지냈다고 한다. 27세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한 맹사성은 기울어 가는 고려의 신하로서 벼슬살이를 시작했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맹씨 가문은 큰변을 당하였다. 그러나 맹사성은 충남 당진의 면천현감을 시작으로 예조의랑, 이조참의, 예문관 제학, 한성부윤, 대사헌 등 높은 벼슬을 지냈다. 한때 태종과 인척이 되는 조대림을 처벌하려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으나 모든 신하들의 반대로 극형을 면하고 다시 벼슬을 시작했다. 결국 세종 9년 우의정, 13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가 건강을 이유로 76세 때 은퇴해서는 충남 온양에 있는 집에서 노후를 지내다가 세종 20년 10월 4일 병든 몸을 치료하다가 한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9세였다.
업 적 : 고불 맹사성은 청백리(淸白吏 : 청렴결백한 관리)의 표본이었다. 49년 동안의 벼슬살이 중 자기 집초차 없었던 맹사성은 벼슬살이로 받은 봉급 대부분을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청빈한 생활 속에서도 꿋꿋한 기상을 잃지 않았고, 바르지 못 한 일에 대해서는 임금의 명령도 거절했다.
[김집]([金集][신독재(愼獨齋)]) [1574~1656]
김집
생 애 : 157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세거지는 충청도 연산(連山)이다. 여덟살에 송상현(宋象賢)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나 학통은 가학을 이어받았다. 18세 때 진사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문장학을 좋아하지 않고 성현의 학문에 전심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로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 부여현감을 거쳐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내고, 그뒤 전라도사ㆍ선공감첨정 등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거나 곧 사직 하였다. 한편, 학업에 전념하여 정홍명(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으며, 윤선거(尹宣擧) 등과 상례를 논하고, 또 아버지 와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ㆍ우부승지ㆍ공조참판ㆍ예조참판ㆍ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 지 않고 곧 사임하여, 태학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벼슬에 머물도록 해달라고 하는 등 안팎으로 그 덕망을 흠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76세 때는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의 특청을 임금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이때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80세에 좌참찬을 거쳐 81세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임금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늘 초야에 묻혀 도(道)를 즐기고,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신독재문집』ㆍ『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등이 있다.
업 적 : 아버지와 더불어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하였는데 위로 이이(李珥)의 학문을 받고 예학(禮學)을 일으킨 김장생(金長生)을 이어받아, 그 학문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 이황(李滉)을 이어받은 영남학파와 더불어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루었다.
[김장생]([金長生][사계(沙溪)]) [1548~1631]
김장생
생 애 :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를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 (宗親府典簿)로 승진하고, 1596년에 한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ㆍ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ㆍ익위(翊衛)의 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호남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함으로써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이듬해에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익 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에 회양ㆍ철원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으로 사업을 겸하고, 집의의 직을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중요한 정사(政事) 13가지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 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인조와 조정은 그의 출사를 간곡히 요청 했으나, 원종의 추숭논의 이후로는 향리에 머물면서 제자와의 강학에만 열중하면서 노년을 마쳤다.
업 적 : 조선 중기 예학의 대두요, 성리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은 1613년(광해군 5)에는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계축화옥)에 연루 되어 처벌의 위기를 맞았으나 누명을 벗고 풀려난 후 연산으로 낙향하여 10여 년간 은거하면서 예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몰두하였 다. 그 후 형조참판까지 지낸 인물이라는 면에서도 이름을 낸 인물이지만,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건 그의 효심이다. 우리 옛 풍습 인 3년간의 시묘생활이 바로 김장생으로부터 생겼다고 전한다. 저서로는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요(喪禮備要)》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 《경서변의(經書辨疑)》등이 있고, 죽은 뒤에 《사계유고(沙溪有故)》가 간행되었다.
[김정희]([金正喜][추사(秋史)]) [1786~1856]
김정희
생 애 : 어려서부터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눈에 띄어 그로부터 실사구시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1819년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참의,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 병조참판 등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24세 때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가 당시 중국의 대학자인 옹방강(翁方綱) 등과 돈독히 교류하였고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법을 익혔 다. 1840년에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는데 유배지에서 그는 역대의 명필을 연구하여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1848년(헌종 14년) 풀려나왔고, 조정에 복귀한지 2년만인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니 말년 들어 도합 11년을 귀양살이로 지샌 셈이다.
업 적 : 예술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시ㆍ서ㆍ화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를 구현하려 하였다. 근거 없 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며 학문에서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ㆍ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 석(考釋)하고, 1816년에 김경연(金敬淵)과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 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혀 그 전까지의 잘못을 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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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 2015-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