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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 인물

독립운동가

[한용운]([韓龍雲][만해(萬海 ㆍ卍海)])[1879.8.29~1944.6.29]
한용운
생 애 : 1879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15세 때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넓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돌아본 뒤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불교 경전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이때 한문으로 되어 있는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이어 1908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새로운 근대 문명을 돌아 보았다. 1910년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게 되자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격려하며 다니다 가 1913년 귀국하여 불교 학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이듬해에 동래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을 썼다. 1918년에는 잡지<유심>을 펴냈으며 1919년 일어난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독립 선언서> 에 공약삼장을 썼다. 이어 손병희 등 민족 대표 33인과 함께 태화관에 모여<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뒤 일본 경찰 에 붙잡혀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26년 첫시집 『님의 침묵』을 펴냈으며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장을 지냈고, 1930년 조선 불교 청년회를 조선 불교 청년 동맹으로 바꾸어 불교 청년 운동을 이끌었다. 그 해 잡지<불교> 를 인수하여 펴냄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독립 사상을 불어 넣었다. 이어 1935년 첫 장편 소설인 『흑풍』을<조선일보> 에 연재하였다. 이듬해 자신이 이끌어오던 비밀항일단체인 만당사건으로 붙잡혀 옥살이를 하였다. 평생 조국과 불교를 위해 살던 한용운은 해방 한 해 전인 1944년 5월9일 서울 성북동에서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업 적 :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시인이고 승려인 만해 한용운 선생은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3ㆍ1만세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3장을 추가 작성하였으며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등을 발간하여 불교개혁과 경전의 대중화에 앞장서왔고 『님의 침묵』,『나룻배 와 행인』과 같이 민족적 아픔을 표현하는 많은 작품으로 문학활동을 하였다.
[조병옥]([趙炳玉][유석(維石)])[1894.2.15~1960.2.10]
조병옥
생 애 : 1894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였으며, 공주영명학교를 거쳐 1911년 평양숭실학교를 졸업, 1914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곧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주 킹스턴의 와이오밍고교에 입학, 1918년 졸업하였다. 이어 컬럼비아대학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며, 한인회, 흥사단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 같은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그 해 귀국하여 연희전문 전임강사로 있으면서 YMCA 이사와 비밀독립단체 그리스도신우회 회원이 되고, 1927년 신간회 창립위원, 재정총무를 역임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자로 검거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1932년 조선일보사 전무 겸 영업국장에 취임하였으며, 37년 수양동지회사건으로 2년간 투옥되었다.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여 송진우, 장덕수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청의 경무부장에 취임, 치안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진력하였다. 1948년 대통령특사, 유엔 한국대표 등을 역임하고, 1950년 6ㆍ25전쟁 때 내무장관으로 대구 사수의 진두지휘를 담당하였다. 그 후 대통령 이승만과의 의견충돌로 사직하고, 반 독재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이듬해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6년 대표최고위원에 선출 되어 야당을 지도하였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선거를 1개월 앞두고 미국의 월터리드육군의료센터에서 가료 중 병사하였다.
업 적 : 한인회, 흥사단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45년 8.15광복을 맞이하여 송진우, 장덕수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청의 경무부장에 취임, 치안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진력하였다. 1950년 6ㆍ25전쟁 때 내무장관으로 진두지휘하여 대구사수에 공을 세웠으며 대통령 이승만과의 의견충돌로 사직하고, 반독재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이종일]([李鍾一][묵암(默庵)ㆍ옥파(沃波)])[1858~1925]
이종일
생 애 : 1858년 충남 태안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15세에 상경, 김윤식(金允植)ㆍ이상재(李相宰)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82 년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와 정3품의 위계를 받았다. 1898년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 회장, 제국신문사(帝國新聞社) 사장이 되었다가, 이듬해 고종황제 탄신일 기사에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성수망세(聖壽亡歲)'로 오식(誤植), 불경죄로 투옥되었으나 그를 중상하는 측의 고의적인 행위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1906년 천도교에 입교(入敎), 『천도교회월보』의 월보 과장(月報課長), 인쇄소인 보성사(普城社)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3ㆍ1운동 때는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이어 민 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2년 반 만에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선국문연구회(朝鮮國文硏究會) 회장에 취임, 한글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하였지만 선생은 대의를 위해 자신의 안위나 가정은 돌볼 겨를이 없어 영양실조로 아사 순국하였다.
업 적 : 민권의 쟁취가 국권을 수호하는 첩경임을 주장하여 민중 계몽을 위한 제국신문을 간행하였고 오직 나라의 부강과 독립과 안민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였다. 조선국문연구회(朝鮮國文硏究會) 회장에 취임, 한글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애국적 활동은 두루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상재]([李商在][월남(月南)])[1850.10.26~1927.3.29]
이상재
생 애 : 1850년(철종 1)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났으며 1881년 그는 신사 유람단으로 일본에 가는 박정양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후 개 화사상가들과 어울리면서 개화에 눈을 뜨게 된다. 1884년 홍영식의 추천으로 오늘날 우체국에 해당하는 우정국 주사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 김옥균, 홍영식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1887년 청나라가 우리 나라와 미국이 외교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하자, 청나라 공사와 담판을 벌여 미국과의 수교를 성사시키고 귀국하였다. 서재필 등과 함께 1896년 독립협회를 만들고,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를 열어 국민계몽운동을 펼쳤다. 1898년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 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1902년 이상재는 정부의 무능력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2년간 의 옥살이를 했다. 이때 감옥에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출옥 후 황성기독교 청년회(YMCA)에 들어갔다. 1905년 을사조약 후 다 시 관직에 나갔으나 1907년 우리 나라 군대가 해산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3ㆍ1 운동에 관련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풀려 난 이상재는 각종 강연회, 토론회를 통해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어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했고 1924년에는<조선일보> 사장이 되었다. 1927년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조병옥, 안재홍, 홍명희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신간회의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업 적 : 각종 강연회와 지방순회강연 등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고, 광무 2년인 1898년에는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을 지내면서 민중계몽에 전력했으며 탐관오리들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시다가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국체개혁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 사건으로 구금되기도 하였다. 한국 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한국 YMCA 창설에도 기여하였다.
[이범석]([李範奭][철기(鐵驥)]) [1900.12.1~1972]
이범석
생 애 : 1900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원난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교관, 1920년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교수부장이 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청산리대첩에서 제2제대(第二梯隊)지휘관으로 크게 활약하였고, 1923년 고려혁명군 기병대장이 되었다. 1925년에는 소련합동민족군의 수분지구(綏地區)지휘관으로서 소련혁명전 에 참가하였으며, 그 뒤 중국항일군의 흑룡강성군(黑龍江省軍)작전과장, 중국군 유럽군사시찰단원을 역임하였고, 1934년 뤄양군관학교 (洛陽軍官學校) 한적군관대장(韓籍軍官隊長)을 지냈다. 1945년 8월에는 연합군의 자격으로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다가 1946년 6월 정식으로 환국하였다. 1946년 10월에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 비정치ㆍ비군사를 내걸고 국가지상ㆍ민족지상의 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집권자로부터의 억제와 국수주의적 극우단체라는 비난도 받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하였고, 1950년에는 주중국대사, 같은해에 내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52년에는 원외 자유당 부당수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패하였으며, 1953년 이승만(李承晩)의 족청계 숙청으로 자유당에서 추방당하였다. 1956년에는 무소속으로 다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자유연맹을 바탕으로 참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63년에는 ‘국민의 당’ 결성에 참여하여 최고의원이 되었으나 같은해 탈당하였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업 적 :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참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정부수립 뒤에는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의 자리를 함께 맡기도 하고 여러 고위직을 맡기도 하며 정치가로서 면모도 과시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직선적이었고 저돌적이었기 때문에 정치가로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윤봉길]([尹奉吉][매헌]) [1908~1932.12.19]
윤봉길
생 애 :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났다.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수학하고, 19세때인 1926년부터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으며, 20세 때에는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하고, 22세 때에는 월진회 (月進會)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 민족운동을 더욱 정열적으로 전개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 때인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이라는 글을 써놓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청도를 거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이 1932년 1월 28일 상해를 침공하여 점령한 후, 4월 29일 천장절 겸 상해 점령 전승경축 기념식을 홍구 공원에서 거행하게 되어 상해점령 일본군 군정 수뇌들이 여기에 모이게 되자, 윤의사는 백범 김구 선생이 지휘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이에 특공 작전을 감행할 것을 자원하였다. 단신으로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상해점령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군정 수뇌들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섬멸하는데 성공하였지만 현장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5월 25일 현지의 군법재판 단심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에 일본으로 이송되어 그 해 12월 19일 2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업 적 :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하고 월진회(月進會)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 민족운동을 더욱 정열적으로 전개하였다. 윤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는 만보산 사건으로 악화되었던 한인에 대한 중국인의 악감정을 씻어내고 항일운동을 협조하게 만들었고 또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알리는 성과를 이뤄냈다.
[김좌진]([金佐鎭][백야(白冶)])[1889.11.14~1930.1.24]
김좌진
생 애 : 충남 홍성의 부유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15세에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에게 농토를 분배하여 해방시켰으며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18세에 이미 호명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하였다. 1913년에 대한 광복단에 가입하였다가, 1915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1919년 3ㆍ1 운동 때 중국 동북 지방으로 가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고, 사관양성소를 세워 군사를 훈련시켰다. 1920년 9월 청산리에서 이범석ㆍ나중소 등과 함께 일본국과 싸워 크게 이겼는데,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 전투이다. 그 후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을 피해 소련땅으로 갔으나, 소련군과의 충돌로 많은 전사자를 내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신민부를 조직하고 성동사관학교를 세우는 등 항일투쟁과 민족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향년 41세에 부하였던 공산당원에게 암살당했다.
업 적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활약하였으며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미 결성된 광복단에 가담하여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좌진 장군이 승리로 이끈 청산리대첩은 한국무장독립운동 사상 최고의 빛나는 전과를 올린 전투로 역사에 남아 있다.
[유관순][柳寬順] [1902.12.16.~1920.9.28.]
유관순
생 애 :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나, 1918년 여자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 학당에 입학하였다가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 자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되자 만세 시위를 지도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인 지령 마을로 돌아와 서는 천안 · 연기 · 청주 · 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면서 만세 운동을 협의하여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1919 년 음력 3월 1일(양력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음력 3월 1일 정오, 장터에 모 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앞장서서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일본 경찰들이 만세 군중을 무자비하게 죽이자 군중들의 분노는 더욱 끓어 올라, 천안은 온통 독립 만세 소리와 군중의 물결로 뒤덮였다. 결국 그녀는 일본 경찰에 잡히고, 가족들은 일본 헌병들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집마져 불태워졌다. 공주 검사국으로 옮겨져, 그 곳에서 영명학교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 온 오빠 유관옥을 만났다. 그리고, 3년형을 선고받자 항소하여 서울로 다시 옮겨졌다. 서울 법정에서는 재판 중 검사에 게 걸상을 던져 법정 모독죄가 가산되어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듬해 감격의 3월 1일을 맞자 다시 옥중 동지들과 비밀히 연락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 후 더욱 혹독한 고문을 받고, 조국의 독립을 그리다가 그 해 가을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업 적 :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제가 이화학당을 휴교시키자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시위운동상황을 설명하고, 이곳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조인원(趙仁元) · 김구응(金球應) 등의 마을지도자를 규합하여 연기 · 청주 · 진천 등지의 교회와 유림계를 규합, 이해 음력 3월 1 일 아오내[川]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추진하였다.
[이동녕]([李東寧][석오(石吾)]) [1869~1940.3.13]
이동녕
생 애 : 1869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으며 향리 서당에서 전통교육을 받았으며 1892년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합격하였고, 다음해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가서 육영사업에 조력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개화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만민공동회 (萬民共同會)가 열렸을 때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상소하며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으며, 이로 인하여 옥고를 치렀다. 제1차 한 일협약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상동청년회를 조직, 계몽운동을 벌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폐기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 나 곧 석방되었으며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교포교육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를 조직하고, 청년학우회 총무로서 활약하였으며, 1910년 신흥강습소를 설립, 소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과 교포교육에 힘썼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대동신문》《해조신문》을 발행하였으며, 1913년 대종교에 입교하고, 1919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 중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시사책진회를 조직, 단결을 촉진하였다. 1924 년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을 겸직하고 이어 대통령대리가 되었으며, 1926년 국무령, 1927년 주석(主席)이 되었다. 1929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 이사장에 피선되고, 같은 해 재차 의정원 의장이 되었으며, 임시정부 주석은 계속 역임하였다. 1935년 양우조 등과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항일전을 구상하며, 1939년 김구와 전시내각을 구성,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가 중국 사천성에서 1940년 급성폐렴으로 병사하였다.
업 적 :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전덕기, 양기탁 등과 상동청년회를 조직해 계몽운동을 벌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고 1910년 신흥강습소를 설립, 소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과 교포교육에 힘썼다. 주권회복을 위한 민족 운동가의 한사람으로 안으로는 공산주의 밖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와 대항한 민족독립운동가이다.
[김옥균]([金玉均][고균(古筠) ㆍ고우(古愚)])[1851~1894]
김옥균
생 애 : 1851년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김병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고우(古愚), 시호는 충달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뿐만 아니라 그림, 음악 등 예능에도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1872년(고종 9) 알성문과 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교리(校理) ㆍ정언(正言) 등을 역임하면서 관료로서 출세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박규수(朴珪壽) ㆍ유대치 (劉大致) ㆍ오경석(吳慶錫) 등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 을 다녀온 후에는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서재필(徐載弼) 등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고, 박영효 ㆍ서광범(徐光範) ㆍ홍영식(洪英植)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측에 군인양성 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고,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업식 연회를 기회로 박영효, 홍영식 등과 협 력하여 거사하였다. 거사를 감행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의 호조참판으로 국가재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청나라 주둔군의 방해로 3일만에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도코 등지를 전전하면서 10년을 방랑하다가 1894년 3 월 28일 상해 동화양행(東和洋行)에서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김옥균은 갑오개혁으로 개화파가 정권을 잡은 이듬해 서광범과 김홍집의 상소로 죄가 사면되었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이라는 벼슬이 주어졌다.
업 적 : 개화사상가이자 정치가로 서재필(徐載弼) 등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면서 근대사회로의 발전을 꾀하였으며 일본의 힘을 이용하여 나라 를 개혁하려 했다는 잘못은 있으나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화를 앞당긴 공을 무시할 순 없다. 김옥균은 양반 중심의 신분제도를 없애려는 데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했으며 근대 사상과 근대 국가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근대화의 선구자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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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 2017-01-24